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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와룡동 38-2 이묵헌.
조선조 최후의 어진화가 이당 김은호 선생의 돈화문 앞 작업실 겸 자택이다. 〈독서신문〉에서 이당 선생님의 특집기사를 보고 그동안 그렸던 그림 몇 점을 말아들고 이묵헌을 방문하기 전까지 나는 충남 공주 고향집에서 신문배달, 연탄배달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무작정 상경, 이당 문하에서 미술 공부
대학을 갈 수 없다는 다짐을 하고 힘들게 고등학교를 다녔던 터라 내가 시골에서 평생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대답도 쉽게 얻기 어려웠지만, 중·고등학교 때 계속하던 미술활동을 놓기는 정말 싫었다. 연탄배달을 마치고 집에 와서 여섯 식구가 잠든 안방 한 쪽 흙벽에 화판을 기대놓고 그림을 그려왔다.
이당 선생님께 엎드려 절하고 시골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동양화에 대해 선생님께 자문을 여쭙고자 서울에 올라왔다고 말씀드리고 나서 가지고 간 그림을 펼쳐 보였다. 연락처를 남겨두고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여전히 그림을 그릴 생각이 변치 않았다면 서울로 올라오라’는 엽서를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뻐하며 상경해 이묵헌에서 살게 됐다. 이후 그림 그리는 행복한 삶이 46년간 이어졌다. 미술대학에 가는 대신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서 만사를 잊은 채 그림공부만 할 수 있었던 시간은 내게 그렇게 행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일들은 화단에서가 아니라 방송대에서 펼쳐졌다. 1990년에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일본과 중국의 미술 서적들을 보기 위해서 한문 공부를 더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엔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라서 중국에 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연히 대학로에서 방송대 입학 원서를 발견하고 다음날 원서접수 마감시간 빠듯하게 중어중문학과에 입학원서를 낼 수 있었다.
비오는 날 효제초등학교에서 입학식이 열렸다. 중문과 선배들은 나를 대학교수가 될 때까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함께 공부하고 응원하며 이끌어주셨다. 나는 그날 이후로 중문과의 크고 작은 모든 행사를 찾아 선배님들을 따라 다녔고 이것은 신이 내게 다른 세계를 선물하는 기초가 됐다. 마침 내가 살고 있는 가락동에서 교통편이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방배동 강남서초스터디를 추천해줘서 가입했다.

강남서초스터디와 총장배 어학경시대회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책을 보기도 좋아서 스터디에 꼬박꼬박 나가서 선배님들로부터 중국어 기초를 배우게 됐다. 동양화를 하면서 공부한 한자와 한문 실력이 바탕이 돼서인지 독해는  많이 어렵지 않았다. 나이가 가장 많았던 덕분에 꾀를 부리고 게으를 수가 없었던 것이 공부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당시로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대학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젊은날 대학생활에서 누리지 못했던 축제라든가 MT, OT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모습을 본 어린 동기들도 기꺼이 함께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때 선배 중에 20세인 분도 계셨지만, 동기 중에는 10대 후반인 친구도 있어서 나이 많은 내가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은 그들에게도 자극제가 된 것 같다. 2학기 때는 선배님들이 스터디에 시간을 내기 어려워 중국어 한 과목은 내게 수업을 맡기셨다.
가을의 제2회 중문과 어학경시대회에 나도 나이는 많지만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생각에 동기들과 함께 열심히 준비해서 참가했다. 어학경시대회 초기라서 참관인원을 많이 유도하기 위해 바로 옆 건물에서 기초중국어 특강을 진행하는 바람에 특강을 듣고 와서 참가해도 된다는 부정확한 안내를 믿은 게 실수였다. 공부를 좋아하는 1학년들이 특강을 듣는 사이에 1학년 예심이 진행돼 서울지역 본선진출자들이 모두 실격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접하게 되자 모두들 2학년 때는 학과 행사에 등을 돌리게 됐고 나 혼자서 이를 악물고 그들의 몫까지 열심히 준비해서 2학년에게 대상을 수여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경시대회 초기였기 때문에 1학년 때의 낭패를 회복하려는 나와 달리 3, 4학년 선배들은 나보다 실력은 나았지만 즐기는 수준으로만 준비를 했을 거라고 회상해본다.
그해 8월에 중국과 수교했기 때문에 대상 수상자에게는 중국 연수가 특전으로 주어졌다. 고막을 찢는 폭죽소리와 함께 화약 냄새로 가득한 북경외대 기숙사에 들어간 날이 중국의 명절인 1993년 춘절 새벽 0시. 중국에서 재미있게 연수를 마치고 온 후에는 내가 받은 만큼 되돌려 주자는 생각으로 스터디 후배들의 중국어 수업을 맡아 일주일에 서너 과목씩을 가르치며 지금까지 중국어경시대회 참가자들을 거의 전담으로 지도했다. 이것은 일종의 수준 높은 교생실습과 같아서 내가 졸업 후에 중국어 강의를 하고 교수가 되는 과정에 더할 나위 없이 큰 도움을 준 신의 선물이었다.

튜터와 교수 그리고 ‘라오스’로
대학 졸업 후 우리나라에 유일한 유명 중국어전문학원의 초빙을 받아 강의를 하면서 한국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한국외대 동시통역대학원장이셨던 학과장님으로부터 “방송대 졸업했으면 중국어는 잘하겠네”라는 예상하지 못했던 첫 인사를 나누고는 방송대 선배들이 쌓아 놓은 명예로운 전통에 누가 되지 않기를 다짐하며 대학원 생활을 마쳤다.
대학원을 마치곤 학원이 아닌 몇몇 대학과 모교인 방송대 중문과에서도 3년간 튜터로 강의를 이어가게 되자 의정부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임명돼 근무하게 됐다. 총장과 이사장을 설득해 방송대 총장배 어학경시대회와 똑같은 시스템으로 중국어경시대회를 개최하면서 고등학생, 대학생들에게 중국어를 지도했다.
요즘은 이미 여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은퇴 후에도 자신이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는 재교육, 평생교육의 마당이지만, 젊었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공부할 시기를 놓친 분들에게는 방송대는 기회의 장소였고 희망의 등불이었다. 나처럼 경제적 이유로 대학을 포기하고 세월을 기다리던 경우에 질 좋은 강의를 언제 어디서나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방송대 시스템은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게 열려있다.
은퇴 후가 됐든 취직을 앞둔 절박한 취준생이든 나이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공부한다면 그 성과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좋은 미래를 제공할 수도 있다.

내가 40세에 방송대에 입학하면서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었을까? 그저 인사동에서 사온 중국 미술책 한 권이나마 제대로 읽고 중국미술을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방송대 공부는 인생의 중후반을 완전히 뒤바꿨다. 방송대 공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즐거운 일이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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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amf***
    2023-10-27 16:13:33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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