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평화의 길을 가다

금성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부친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조부모 손에서 자라
1979년 방송대 가정학과 졸업
아르헨티나 이민 33년 만에 귀국
부친 피 흘린 곳 가까이 가보고 싶어
방송대가 기회 만들어줘 감사

 

“DMZ 접경지대를 탐방하는 ‘평화의 길을 가다’ 광고가 실린 방송대 학보 위클리를 받자마자 참가하겠다고 결심했어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았죠. 아마도 제가 제일 먼저 참가 신청을 했을 거예요. 혹시 몰라 참가비 먼저 입금하겠다고 했을 정도였어요.”
‘평화의 길을 가다’ 1기 탐방팀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조숙현 학우(국문 2)는 혹시 참가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 무척 걱정했다고 거듭 말했다. 74세인 그가 어째서 이렇게 ‘참가’에 진심을 보였던 것일까. 1박2일 탐방과 돌아오는 길에 사연을 좀더 들었다.

금화에서 전사한 부친 그리워서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위로 형이 둘 있었지만, 모두 일찍이 사망해 독자가 됐는데도 부친은 육군 소위로 전쟁에 참전하고 말았다. 한국전쟁 격전지인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는 흔히 강원 북쪽의 평강을 정점으로 남쪽으로 철원과 금화(김화)를 잇는 삼각모양의 지역을 말하는데, 조 학우의 부친이 바로 이 철의 삼각지대, 금성지구 전투에서 산화했다.
“아버지 얼굴을 몰라요.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부모 손에서 컸어요. 가끔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생각을 하며 많이 울었죠.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다 했겠어요? 간첩이라도 돼서라도 돌아오셨으면, 그러면 뭐 신고하면 되잖아요. 그렇게라도 아버지가 있어서 얼굴 한번 봤으면 하면서 컸죠. 팔이나 다리를 다쳐 쩔뚝거리는 상이군인 모습으로라도 돌아만 왔더라면 하는 생각도 수없이 했죠. 그러니 할머니 할아버지는 얼마나 보고 싶었겠어요. 자기 아들인데요. 근데 한 번도 눈물을 보이신 적이 없어요. 저에게 아버지는 나라 위해 돌아가신 애국자다, 자존감을 지니라고 늘 강조하셨어요. 그렇게 어른이 됐지만, 아버지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피 흘리신 곳을 최대한 가까이 가보고 싶었죠. 마침 방송대에서 그런 기회를 마련해준 거죠. 얼마나 고맙던지요. 제가 주저하지 않고 탐방에 참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조 학우는 철원 고석정 근처 도로 주변에 ‘김화’라는 글자를 단 이정표 사진을 찍으면서, 홀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1일차 일정을 마치고 탐방 소감을 나누는 토론 시간이 돼서야 그는 자신에게 그런 가슴 아픈 개인사가 있다는 걸 조심스럽게 꺼냈다. 1박2일 일정 내내 그는 담담했다. 남쪽의 철원평야와 북쪽의 평강평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소이산전망대에 올랐을 때는 하염없이 북동쪽 산 너머를 응시하기도 했다.
그는 방송대와도 인연이 깊고 오래됐다. 1979년 당시 가정학과를 졸업했다. 셋째 아이를 업고 공부하면서 겨우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여느 가정주부와 같은 일상적 삶을 살다가 1980년대 말에 아르헨티나로 가족 모두가 투자이민을 떠났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에서 33년을 살다가 지난해 말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르헨티나에 투자이민을 나왔지만, 결국 이곳 경제가 무너지면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후회하지 않는 삶이었고, 지금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요. 혼자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는 게 몸에 익었는데, 하나둘 도전하고 있는 중이죠.”
가정학과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의류 사업에 나섰던 그는 그곳에서 음악에도 관심을 보여 음악원에서 공부까지 마쳤다. 탱고 노래를 불러 유명해지기도 했고, 해외에 나간 한국 교포들이 참여하는 문학 공모제에서 빼어난 시를 써서 가작을 수상하기도 했다.

방송대를 다시 찾은 이유
사실 조 학우가 아르헨티나 이민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데는 1970년대 방송대 가정학과에서 공부하면서 배웠던 게 큰 도움이 됐다.
“「인간 발달」 과목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아버지 없이 자랐잖아요. 조부모님 손에서 컸으니까. 그런데 그 과목에서 배우길, 부모가 없더라도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내용을 배운 거죠. 거기서 힘을 얻었어요.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결심한 거죠.”
그가 타국에서 자리를 잡을 때쯤 두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조 학우의 나이 50세에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집안의 기둥을 잃고 그는 홀로 낯선 타국에서 삶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 무엇보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지켜보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사고가 바뀌었다.
‘아, 죽음이라는 것, 삶과 죽음은 숨 하나 차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고, 이 시간을 정말로 값있게 황금같이 쓰면서 살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이상 무서운 것도, 부러운 것도 없었다. 외유내강의 모습으로 자신에게 엄히 대하면서 자녀들을 키워 모두 유학을 보냈다. 그렇게 20여 년을 더 살다가 코로나19를 맞으면서 인생 대전환을 생각하게 됐다.
“코로나 때문에 이러다가 내 인생의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는데, 인프라도 없는 나라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냥 그렇게 아침, 점심, 저녁 먹고 화장실 가고, 자고 일어나서 또 그 일을 또 하고 사는 게 끔찍해졌어요. 한국에서는 정말로 나이 들어도 뭔가를 더 배울 수 있고, 자신의 뜻에 맞게 어떤 희망을 가지고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귀국을 결심했어요.”
떠날 때는 남편과 아이들이 옆에 있었지만, 돌아올 때는 혼자였다. 그러나 그는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았다. 그에겐 ‘분명한 계획’이 있었다. 곧장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나이 들어서 문학을 공부한다는 게 좀 무리는 있지만 한번 해볼까, 하려면 제대로 철학적인 시를 써야겠다, 아무렇게나 하지 말고. 그래서 방송대 국문학과를 선택했다.
조 학우는 자신을 가리켜 ‘공부가 생활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가 70대 중반에 다시 방송대에 진학한 것은, 방송대가 단순히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라, 졸업장과 함께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꾸준히’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어서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뜻밖의 복병을 만나 조금 고전하고 있다. 바로 체력 문제였다. 늘 건강했지만, 공부라는 게 그만큼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란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60대 같으면 좀 버텨내겠는데, 70대 나이는 속이지 못하겠어요. 체력이 딸리더군요.”
그렇더라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분명히 배우는 게 있고, 거기서 만족하는 게 많기 때문이다. 학점이 어떻게 나왔냐고 물었더니, 귓속말로 ‘B 학점 이하는 없다’라고 말했다.

“품격 있는 프로그램, 계속 참여하고 싶어”
조 학우는 ‘평화의 길을 가다’ DMZ 탐방 기획을 ‘품격이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평가했다. 왜 그렇게 평가하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 아버지가 저 금성지구 전투에서 총을 맞고 피를 흘렸을 거 아니에요? 그 피가 이 땅에 스며들어 그 위에서 우리가 이렇게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버지가 피를 흘렸던 곳, 그러니까 막 가슴이 뿌듯한 거예요. 귀한 생명을 나라 위해 던지신 많은 분들의 희생으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살고 있으니, 의미가 크죠. 정말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 근처를 조금이라도 밟아보고 싶었는데, 이런 기회가 만들어진 거죠. 앞으로도 계속 참가하고 싶어요.”
74세의 나이지만 그는 방송대 공부와 함께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삶을 살겠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그렇게 남모르게 이웃을 도왔던 조숙현 학우. 남아 있는 인생의 황금 시간을 가치 있게 살겠노라고 소이산전망대에서 아버지에게 약속했다고 말하는 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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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es***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금성전투에서 아군의 피해가 전사및 실종이 11,000여명인데 상당수가 포로로 잡혀 이북으로 끌려갔으며, 60여년만에 구사일생으로 이북에서 탈출하여 고국으로 돌아오신분의 증언도 있읍니다.
    2025-06-25 13:11:09
  • lees***
    저도 군제대하고 일본유학하고 10여년정도 그곳에서 생활했었지요. 지금은 서울에서 거주합니다. 아무쪼록 건강관리 잘 하시고 .. 그럼 이만.
    2024-02-06 19:17:12
  • *** 수정 | 삭제
    반갑습니다. 저는 일본학과 입학하고 10년만에 작년 2학기 복학해서 한학기 마치고, 올해 1학기 등록하고 학보로 넘어와서 여기저기 보다가 금화라는 글귀가 저에게도 남다른 사연이 있어서 읽어보니 같은 공통점이 많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남겨 봅니다. 저희 아버지도 6.25전쟁 막바지 금성전투에서 부상을 입으시고 야전병원으로 후송돼 1년여간 치료 받으시고 다행히 퇴원하셨고 , 큰누님이 50년생,제가 막내 올해 환갑, 그리고 고향이 익산입니다.
    2024-02-06 19:13:18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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