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연말을 보내는 세 가지 키워드

소중한 것을 잃기 전 신이 준 깨달음의 시간

 

1990년대 초, 대학 진학률이 높지 않은 시대. 많은 여성이 상고 졸업 후 경제활동을 했다. 소수 여성만이 대학에 진학했고, 그나마 여성들이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분야에 지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기계공학 분야에 진학했다.

 

졸업 후 방산 관련 업체에서 20여 년 동안 일했다. 그러는 동안 세월과 시대는 빠르게 변화했다. 회사는 사원들에게 직무 관련 지식 등 많은 걸 요구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일 중독에 빠져 하루 16시간을 회사 일에 매달렸다. 결국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고,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이유로 그렇게나 좋아하던 일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1년간 집에서 휴식기를 가지면서 자격증 취득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레 평생교육이 눈에 들어왔다. 방송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방송대와 인연의 시작이었다.

 

관심도 없던 인문학을 접하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생각보다 성적도 잘 나오니, 공부도 탄력을 받았다. 학년 대표를 맡아 봉사하면서는 ‘섬김’의 의미도 알게 됐다. 학교, 학우와 소통하면서 학교 생활을 하다 보니 시나브로 평택학습관 회장이 되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방송대에서 공부하면서 새로운 기회도 생겼다. 한 대기업의 품질경영 파트에 입사한 것이다. 기쁨도 잠시, 업무는 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부담스러웠고 본사로부터의 압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살인적이었다. 간신히 휴식기를 보내며 심신을 안정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시련이 닥친 것이다.

 

4시간만 자면서 회사 일을 했다. 학업 병행은 물론이요, 여기저기서 도움을 요청하는 평택학습관 행사도 챙겨야 했다. 불행한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5월에는 급기야 친정엄마가 혈압으로 쓰러지셨다.

 

회사는 회사대로 업무 압박을 가해왔고, 가정은 가정대로 돌봐야 할 사람이 생겼다. 감당할 수 없는 일정과 사정으로 내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내 마음은 정말이지 전쟁터 같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대로 방송대 공부를 포기해야 할까?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고, 현실을 피해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학생회 임원에게 “평택학습관 회장직을 내려놓고 공부를 포기하겠다”라고 말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임원은 그런 나를 ‘무지하게’ 혼냈다. 정신 차리라고, 학습관 회장이 여기서 포기하면 회장을 믿고 따라가는 우리는 누구를 믿고 따라가겠느냐며. 정말이지 서러울 정도로 혼이 났다. 자존감이 낮아진 나에게 그 임원의 말은 ‘채찍’이자 ‘당근’이었다.

 

회사 일이 버겁다고, 학업과 학습관 일이 너무 많다는 핑계로 그간 잘 챙겨주지 못했던 대학생 딸도 곁에서 나를 다잡아줬다. 지금껏 힘들게 공부해오셨는데, 지금 포기하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느냐며, 함께 공부해보자고 힘을 실어 줬다. 그날 대화를 계기로 서로 대학 공부 과제를 놓고 토론식으로 대화하는 시간이 차츰차츰 늘어갔다.

 

친정엄마의 병간호를 위해 낮에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았다. 퇴근해 친정엄마를 돌볼 때면, 책을 펴고 방송대 공부를 했다. 친정엄마가 아프면서 죽어라 일만 했던 내가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알게 된 것이다. 이제는 다 컸다는 생각에 딸아이에게 무관심했던 이기적인 나의 마음도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올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나는 나를 되돌아보는 자아성찰의 시간을 오롯이 가지게 된 것이다. 소중했던 것들을 잃기 전에, 그래도 신이 나에게 다시금 깨달음의 시간을 주신 것 같아 마음속 깊이 뉘우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낀다.

 

거센 폭풍우가 지난 후 나는 적극적으로 학습관 스터디를 진행하면서 학우들의 학교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상담해 주는 동시에 학업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멘토의 역할을 즐겁게 수행하고 있다. 또한 타 지역 및 지역대학에서 특강을 진행하고 학습 봉사를 하면서 나눔의 기쁨을 채워가고 있다. 현재는 경기지역대학에서 학습관협의회 의장으로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학업 갈무리를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나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다. 나로 인해 포기하려던 학업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며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뿌듯함’이라는 감정과 함께 ‘보람’도 덤으로 얻었다. 

 

 

어머니의 낡은 신발 그리고 시누이가 선물한 커플 운동화

 

시누이에게 커플 운동화를 선물로 받았다. 결혼생활 30년 동안, 불협화음처럼 조각난 음표들이 담장을 한두 번 넘었으랴. 그러나 시누이의 바람처럼 우리 부부가 커플 운동화를 함께 신고 나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신발은 한 번도 나란히 걸어본 일 없이 조금씩 낡아갔다.

 

나는 신발을 패션이라든가 장식용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선물로 받아서였는지 이 커플 운동화는 나에게 처음으로 사치품으로 다가왔다. 신발은 신기만 하면 방향을 잃고 춤을 추던 안데르센 동화 속 빨간 구두처럼 잃어버렸던 신발들의 기억을 끌고 나와 춤을 추듯 여기저기 발자국을 찍어 놓았다.

 

균일하게 닦아놓았던 시간의 길이 헝클어지기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갱년기를 맞은 나는 빨간 구두를 신은 아이가 돼 갔다. 신발이 이끄는 시간의 길가엔, 가슴 밑바닥으로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유년의 웃음소리, 심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통증, 비릿하고 아린 청춘의 기억들, 가시를 세우며 사투를 벌이던 한 송이의 계절이 지고 있었다.

 

신발은 나를 첩첩산중 산골 마을 풍경 속, 허름한 문지방 밑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곳에는 작은 신발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어머니는 문지방 밑에 올망졸망하게 흩어져 있는 신발들을 끝내 떠나지 못하고, 가난의 무게를 툭툭 털어 낡은 빨랫줄에 널어놓으셨으리라. 낡은 신발들이 남긴 어머니의 발자국에는 뜨거운 눈물 같은 시간들이 고여있었다.

 

어머니의 노년은 혹독하게 추운 계절이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견딜만했다. 자식들을 보듬어주던 따뜻한 말들이 습관처럼 시간의 틈새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순식간에 말들이 거칠어지고, 통증이 되고, 노여움으로 변했다가 고요해지기를 반복했다. 항암치료를 반복하던 8년째 되던 해, 어머니는 더 이상 신발을 신지 못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현관에는 어머니의 낡은 신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낡은 신발에 나의 노년의 모습이 투영된 듯 도시의 많은 인파 속으로 도망쳤다. 망각은 나의 노후가 아프고 고통스러울 거라고 말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의 촘촘한 돌다리를 건너가는 사람들의 틈새로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갔다.

 

어느덧, 나는 기억 속의 긴 시간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신발을 벗다가 문득, 눈밭 위에 발자국을 찍어 놓았던 새들의 가벼운 맨발을 생각한다. 신발을 벗고 죽음 너머로 걸어 들어간 어머니의 가벼운 맨발도, 그 맨발 위로 덮치던 고요도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기억 속을 헤집어 놓으며 집 안까지 따라 들어왔던 발자국들을 모아 신발장 안 깊숙이 벗어 놓는다. 커플 선물로 받았던 남편의 운동화 옆에 나란히.

 

 

아이가 성장한 만큼 나 자신도 성장한 한 해

 

올해가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올해 초, 우리 가족은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기대도, 걱정도 많았다. 돌봄 공백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이는 학교에 금방 적응했고, 돌봄교실과 학원들을 오가는 생활에도 곧 익숙해졌다. 그래도 가끔은 아이의 방과 후 일상을 세심하게 챙겨줄 수 없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마치 일하는 엄마의 사정을 안다는 듯, 씩씩하게 스스로 해나가는 법을 배웠다.

 

올해를 돌이켜보면 아이가 성장한 만큼, 나도 엄마로, 그리고 나 자신으로 조금 더 성장한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 그중에서 특히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건 대학원 졸업이었다. 입학했을 때 돌쟁이였던 첫째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 무려 6년 만의 졸업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2017년, 방송대 대학원 평생교육학과에 입학했을 당시, 나는 첫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 중이었다. 독박 육아를 하며 대학원 공부를 하는 게 만만치 않았지만, 대학 졸업 이후 오랜만에 학생 신분으로 수업을 듣고, 과제를 내고, 시험도 치르는 일상은 육아에 지친 내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해에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복직까지 하면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던 탓이다. 잠을 충분히 잘 수도, 제때 끼니를 챙겨 먹을 수도 없었던 워킹맘에게 공부는 사치였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까지는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한 번 접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는 쉽지 않았다. 시간도, 의지도 문제였다. 그럼에도 시작을 했으니 마무리는 해야겠다는 결심이 나를 움직였다. 잘하려고 애쓰기보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한다는 마음으로, 올해 초 졸업시험을 간신히 통과했고, 지난 여름,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원 졸업을 했다고 해서 나의 일상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아침이면 직장에 나가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두 아이를 돌보며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살고 있다. 그래도 졸업하고나니 그동안 미루고 미뤄왔던 숙제를 끝낸 것 마냥 후련하다. 또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앞으로 배움을 이어나가기 위한 디딤돌 하나를 놓은 것 같아 든든하기도 하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평소에도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엄마가 공부까지 한다고 하니, 섭섭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엄마가 무사히 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언제나 응원해주고, 도와줘서 감사하다. 우리 가족에게 여러 의미로 특별했던 한 해도 이제 저물어 간다. 다가오는 2024년에는 아이들과 눈 마주치고,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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