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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성균관대 초빙교수·동양철학 -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에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와 한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생물학에서 유학의 지혜를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유학과 사회생물학』,『식물처럼 살기』 등을 썼다.

예쁜 꽃을 보면 정말이지 따고 싶다. 스윽 손이 저절로 간다. 가게에서 파는 꽃도 화려하지만 길가에 핀 꽃들은 왜 이리 자연스레 고울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에는 이런 인간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이야기가 나온다. 19세기 영국 시인 테니스의 시에는 벼랑에 핀 귀여운 꽃을 뿌리째 뽑아서는 낱낱이 알아보고 싶은 욕구가 있다. 반면 17세기 일본의 시인 바쇼는 길을 가다 울타리 옆에 쫑긋 고개를 든 냉이꽃을 보고 “아, 여기 냉이꽃이 있구나!”라고 감탄한다. 상당히 다른 반응이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전자를 ‘소유적 삶의 양식’, 후자를 ‘존재적 삶의 양식’의 좋은 예로 꼽았다.
인간 앞에 있는 꽃은 운명의 갈림길에 있다. 뽑히거나 꺾이어 일찍 죽게 되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자연이 준 수명을 누리거나 하는,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왜 그리 소유하고 싶어 할까? 길가에 오롯이 자리한 작은 꽃이라도 그것을 대상화해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어디 꽃뿐이랴?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인간이 만들어 낸 수없이 많은 물건들은 그렇다 치고, 자연을 형상화하고 속성을 입힌 숭배의 대상도 무수히 많다. 신조차도 인간의 소유욕이 만들어 낸 하나의 대상일진대.
그래서 인간 자신의 욕망이 투사된 신의 계율들은 인간들에게 거래품목이 됐다. 신의 아들 예수는 성전에서 사고파는 자들을 추방한다(마태복음21:12), 그러고 나서야 성전으로 들어간다. 진정한 신의 거처에는 거래가 있을 수 없다는 거다. 신의 자리는 비워져야 한다는 게 중세의 수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해석이다. ‘소유적 삶의 양식’으로 신을 따르면 종교적 행위들이 거래수단이 된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신께서도 내 소원을 들어주실 거야.’ 성전에서 사고파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을 상징한다.
소유하는 인간은 종국에는 욕망의 문제에 봉착한다. 불교는 그것을 ‘열망’이라 하고 기독교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했다. 유교는 이것을 ‘욕구’로 보았다. ‘소유적 삶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사물과 타인을 소유하고 소비하며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도 물화(物化)한다. 꽃을 따서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 차를 사는 것으로 나의 에고(ego)는 한 조각 더 늘어난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내가 지닌 꿈과 목표도 마찬가지다. 소유양식으로 그것을 달성하면 나의 소유는 늘어나고 나의 존재는 소외된다. 그래서 다시금 소유하고 싶은, 성취하고 싶은 목록들을 만든다. 열망과 탐욕과 욕구는 끊이지 않고 자기 증식한다. 기독교와 불교는 열망과 탐욕을 끊어내려고 기를 썼고 유교는 욕구를 줄이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자연에서 누리는 것, 공기와 빛을 소유의 대상이라고 하면 난센스다. 지구도 마찬가지다. 살아있는 동안 빌려 쓸 따름이다. 요즘 공유와 접속의 코드를 내세운 글로벌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우버(Uber)와 에어비앤비(airbnb)가 대표적이다. 함께 하지 않으면, 서로 얽혀있지 않으면, 생명체는 존속될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살려는 욕망’에 주목했다. 바로 ‘생존적 소유’이다.
여기에는 합리적인 생존 충동이 작동한다. 왜 가냘픈 냉이꽃이 우리 눈에 확 들어올까? 인간이 꽃을 보고 느끼는 경이로운 감정은 무엇일까? 그 꽃을 따지 말고 그냥 두는 것이 더 나은 이유는 무엇일까? 꽃 뒤에는 열매가 있다. 그래서 꽃을 잘 기억하고 ‘여기 꽃이 피었네!’하고 감동했던 조상들의 유전자는 아직껏 살아남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생존하려면, 살아남으려면, 아쉽지만 ‘소유적 존재양식’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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