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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3월 25일 평안북도 용천 군 출생
1951년 1월 7일 서울 대광고등학교 재학 중 입대 육군 제7사단 소속
1951년 6월 28일 강원도 화천에서 전사

2월 초 갑자기 날아든 삼촌에 대한 소식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이의 슬픔에 빠져들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사한 삼촌에 대해서는 그냥 막연하게 공부를 잘했고, 운동을 잘했고, 대광고등학교 재학 중 6·25 전쟁에 참전 그리고 전사, 이외에는 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께도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군 유해 발굴단으로부터 전해진 삼촌 소식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슬픔을 주었다.


삼촌의 위패가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거리가 나의 고향인 상도동과는 초등학교 시절에 걸어서 소풍 갈 만큼 가까움에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아직 유해를 발견하지 못해서 위패만 모셔져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을 더했다. 전해진 서류에는 입대한 지 불과 6개월도 되지 않아 전사하셨다고 기록돼 있었다.


핏줄이어서일까? 뼛속까지 스미는 아픔과 슬픔은 나를 기나긴 우울의 터널에 가두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무엇을 알아서 전쟁터에 나가셨을까? 아니 전쟁터에 가고 싶었을까? 열아홉 살을 막 맞이하던 1월에 입대해서 그해 6월에 전사….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1951년 3월에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렀을 때 학도병들을 되돌려 보내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병력이 빠지는 것을 우려해 돌려보내지 않은 상관들이 있었다고 한다. 삼촌은 화천 최전방에 계셔서 돌려보내지 않으셨나!


복합적인 슬픔과 억울함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닥부터 차오름과 함께 죄송함이 더해져 긴 시간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의 한 중간지점에서 전쟁터로 가야만 했던 19세 청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서울에서 화천까지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민족을 알고 겨레를 알았을까? 당연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셨겠지? 그러나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산화한 본인의 모습을 그리고 산화한 흔적을 추스르지 못해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말이다.


현충원을 찾았다. 현충탑 바로 뒤쪽에 있는 위패 봉안당 문을 열고 계단을 내딛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이 막히면서 새어 나오는 오열을 참을 수 없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이 젊은 청춘들을 이곳에 가두어 놓았나? 위패가 있는 오석판은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지만 그 끝을 볼 수 있는 높이였고, 옆으로는 두 팔을 펼쳐도 닿을 수 없는 길이의 오석판에 미쳐 셀 수 없는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10만 개가 넘는 위패는 아직 그 유해를 찾지를 못해서 이곳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계급을 보니 대부분 이병, 일병이다. 그 속에서 내 삼촌의 위패를 찾을 수 있었다. 위패로 처음 뵙는 삼촌에게 늦은 인사와 죄송한 마음을 전하며 생각해 본다.


이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나라는 무엇이며, 민족은 무엇이고 또 희생은 무엇일까? 어린 나이의 청년들이 지키고자 했던 이 나라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 나라와 조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이지만 올해의 6월은 특별하게 와닿는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국군 유해 발굴단 장병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아울러 전쟁 유가족이나 친인척 되시는 분들은 DNA 시료 채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셔서 발굴되는 유해가 하루빨리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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