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숙 문화교양학과 4
1979년 초동(初冬), 나는 냉기 가득한 거리로 나섰다. 마음은 시럽고 햇살은 투명했다. 나의 걸음은 설렘과 긴장과 주눅 듦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멈췄다. 대학입학예비고사장, “그래, 성적표를 들이밀면 못 보낸단 말은 안하실 거야.” 시린 가슴을 조각 난 햇살 부스러기에 데우며 치룬 시험이었으나 생활고에 지친 부모님과 아우들 앞에 성적표를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가난이 맏이인 내게 옮아 와 통증이 되던 날의 풍경이다. 이후 1984년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 올F학점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허탈하고 쓸쓸했다. 그러나 대학성적표라는 것이 내 손에 들려있다는 사실에 나는 설렜다. 이즈음 근로기준법은 로컬 직장인을 보호하지 못했다. 입학식도 출석수업도 아니, 전 학사일정을 수행해 낼 수 없음에 좌절했다. 그리고 2016년 방송대 문화교양학과에 입학해 방송대 인이 되었다. 나는 정작 벽이라 말하였으나 학교는 그 햇빛자리에서 묵묵히 나를 기다려주었던 것이다.
일본의 불교 선종은 수도승들에게는 하루 두 끼 식사만 허용 해, 그들은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뜨거운 돌을 품고 잠을 청했다고 한다. 무엇을 견디게 하는 힘,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힘, 가고자 한 길을 끝내 가기 위해 그들이 했던 것처럼, 나를 나이게 하고 허기를 견디게 해 준 ‘품속의 돌’이 있다. 나를 나답게 하고, 두 끼 식사만 허락돼 ‘앎’에 주린 배를 움켜쥐고 추위에 잠 못 든 밤을 견디게 해 준 ‘품속의 돌’, 아이덴티티.
나는 지난해 시집 『동백꽃 편지』를 출간하였다. 몇 해 전 문단에 등단해 작품 활동을 해 왔으나 문학에 대한 지평을 넓히고 세계를 두텁고 깊게 인식하고자 문화교양학과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나에게 방송대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가게 하는 기호로서의 건축학 말이다. 다양성의 총합인 다수의 개인이 집단지성을 이루는 곳, 삶의 속도에 따라 각자 이정표는 달라도 한 물줄기로 만나 새 물길을 내는 곳, 평생교육의 장으로 세계를 통섭해가는 지성의 ‘아고라’.
사람은 내가 나일 때 가장 자유롭다.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때 비로소 진정한 나(我)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세계로의 확장이며 어떠한 조건에도 편협하지 않는 균형감의 회복이다. 나를 만나지 못하고 무엇을 얻었다 말하겠는가. 어제의 내가 아니라 어제와 다른 변화된 나를 향해 오늘도 나는 책장을 넘긴다.
사무엘 베케트는 희극『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인간군상에 대입시켜 기다림만을 위한 기다림을 한다고 지적한다.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고도’를 소모적으로 기다릴 뿐이라고, 그의 지적처럼 마음의 말에 귀 닫고 막연히 ‘고도’만을 기다리지는 않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다양성의 총합인
다수의 개인이
집단지성을 이루는 곳,
삶의 속도에 따라
각자 이정표는 달라도
한 물줄기로 만나
새 물길을 내는 곳, 평생교육의 장으로
세계를 통섭해가는
지성의 ‘아고라’
가난이 맏이인 내게 옮아 와 통증이 되던 날의 풍경이다. 이후 1984년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 올F학점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허탈하고 쓸쓸했다. 그러나 대학성적표라는 것이 내 손에 들려있다는 사실에 나는 설렜다. 이즈음 근로기준법은 로컬 직장인을 보호하지 못했다. 입학식도 출석수업도 아니, 전 학사일정을 수행해 낼 수 없음에 좌절했다. 그리고 2016년 방송대 문화교양학과에 입학해 방송대 인이 되었다. 나는 정작 벽이라 말하였으나 학교는 그 햇빛자리에서 묵묵히 나를 기다려주었던 것이다.
일본의 불교 선종은 수도승들에게는 하루 두 끼 식사만 허용 해, 그들은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뜨거운 돌을 품고 잠을 청했다고 한다. 무엇을 견디게 하는 힘,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힘, 가고자 한 길을 끝내 가기 위해 그들이 했던 것처럼, 나를 나이게 하고 허기를 견디게 해 준 ‘품속의 돌’이 있다. 나를 나답게 하고, 두 끼 식사만 허락돼 ‘앎’에 주린 배를 움켜쥐고 추위에 잠 못 든 밤을 견디게 해 준 ‘품속의 돌’, 아이덴티티.
나는 지난해 시집 『동백꽃 편지』를 출간하였다. 몇 해 전 문단에 등단해 작품 활동을 해 왔으나 문학에 대한 지평을 넓히고 세계를 두텁고 깊게 인식하고자 문화교양학과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나에게 방송대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가게 하는 기호로서의 건축학 말이다. 다양성의 총합인 다수의 개인이 집단지성을 이루는 곳, 삶의 속도에 따라 각자 이정표는 달라도 한 물줄기로 만나 새 물길을 내는 곳, 평생교육의 장으로 세계를 통섭해가는 지성의 ‘아고라’.
사람은 내가 나일 때 가장 자유롭다.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때 비로소 진정한 나(我)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세계로의 확장이며 어떠한 조건에도 편협하지 않는 균형감의 회복이다. 나를 만나지 못하고 무엇을 얻었다 말하겠는가. 어제의 내가 아니라 어제와 다른 변화된 나를 향해 오늘도 나는 책장을 넘긴다.
사무엘 베케트는 희극『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인간군상에 대입시켜 기다림만을 위한 기다림을 한다고 지적한다.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고도’를 소모적으로 기다릴 뿐이라고, 그의 지적처럼 마음의 말에 귀 닫고 막연히 ‘고도’만을 기다리지는 않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다양성의 총합인
다수의 개인이
집단지성을 이루는 곳,
삶의 속도에 따라
각자 이정표는 달라도
한 물줄기로 만나
새 물길을 내는 곳, 평생교육의 장으로
세계를 통섭해가는
지성의 ‘아고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