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강성남의 그노시스

대항해시대의 신대륙 발견은 육체의 근대화를 이뤘고, 르네상스는 정신의 근대화를, 종교개혁은 영혼의 근대화를 이뤘다고 한다. 근대화 이후 근대문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사람들은 근대문명에 길들어 느림을 견디지 못한다. 빠른 직선의 삶을 선호한다. 본래 자연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자연의 시간을 용납하지 못하는 근대인들은 구부러진 것을 참지 못해 기어이 이를 직선으로 펴고 만다.


지역대학에 강의하러 갈 때 타는 KTX 창밖 곡선의 도로를 볼 때마다 저쪽 땅을 사면 훗날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지인의 말이 생각나곤 했다. 지인은 ‘곡선의 도로에 인접한 땅을 사두면 언젠가는 직선으로 도로가 날 것이기 때문에 땅값이 오른다’라고 했다. 전형적인 근대인 발상이다. 직선은 우회하는 삶을 허용하지 않는 완고함이다.


인간의 삶이 어디 직선으로만 달릴 수 있나? 인생의 길은 나선형 코르크스크루(corkscrew)처럼 곡선의 모습을 한 게 틀림없다. 직선은 생명의 원천에서 차단됐다는 의미다. 생명의 원천에서 차단된 사람은 오직 가속과 직진의 욕망 엔진을 달고 있을 뿐이다.


알고리즘과 속도성을 제일의 목표로 삼는 정보경제사회는 근대적 발상의 종착점인 듯하다. 게다가 가속성은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가치로 자리매김했다. 이 가치를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를 두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인공지능의 능력을 속도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물동량이 폭증하면서 도로를 확충하거나 신설하는 등의 방식처럼 데이터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빠른 처리를 위한 반도체 성능 향상을 꾀하는 게 당연시된다.


챗GPT를 써보면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번에 내놓지 못하고 타자 치듯 한 단어씩 띄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시간의 지체가 그래픽처리장치(GPU, 또는 tensor core)와 메모리 사이에서 발생한다고 알려지면서 고대역폭 메모리(HBM)가 인기다. 데이터 처리 성능을 높이기 위해, 비유컨대 일종의 차선을 확장하고 2~3층 버스를 달리게 하는 등의 온갖 아이디어가 구현되는 상황이다.

칸트가 설정한 이성, 인간 주체는 철학사에 진리 개념의 전환을 가져왔지만, 인공지능(AI)이 빠르게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 그가 인간 주체에 던진 질문의 의미는 또다시 개념의 전환을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칸트는 근대인의 질문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그가 던진 질문은 중세인이었다면
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오백여 년 전 이미 육체, 정신, 영혼의 근대화를 이뤘다는 우리가

이런 질문에 진지한 답을 내려야 할 시점에 당도했다.

 


이에 발맞춰 오픈 AI가 2024년 5월 13일 최신 거대언어모델(LLM)인 GPT-4o(‘o’는 Omni-의 머리글자)를 공개했다. GPT-4o의 평균 응답시간은 0.232초. 이는 평균 0.32초로 대답하는 인간의 응답시간을 감안할 때, AI와 진정한 의미의 ‘실시간 대화’를 물 흐르듯 이어가는 시대가 열리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마디로 사람과 견줄 만한 속도로 세상을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AI가 나온 셈이다.


구글도 거대언어모델(LLM) 기반 생성형 AI ‘제미나이(Gemini)’를 공개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 전도 여행 목적지로 로마를 정하고 해상으로 이동하다가 풍랑을 만나 지금의 몰타(Malta)에 도착해 석 달을 머물렀다는 기록이 신약성경 「사도행전」 28장에 나온다. 바울이 몰타를 떠날 때 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든 배의 이물(bow)에는 수호신인 제미나이(헬라어로는 ‘디오스쿠로이’)가 조각돼 있었다. 제미나이는 레다와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온 말이다.


그래서 제미나이는 이미지, 글, 음성, 비디오를 쌍둥이처럼 동시에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의미로 이름이 붙여진 것. 제미나이는 수학·물리학·법률·의학 등 57가지 주제를 복합적으로 활용해 문제해결 능력을 평가하는 테스트에서 90%의 점수를 얻었다. 인간 전문가(89.8%)와 대등한 수준의 AI 모델이다.


제미나이를 이용한 검색 혁명이 예고된 상태다. 단체 해외여행을 가면 일행 중에서 길을 잃는 사람이 꼭 생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모바일에서 주변을 비추면 거리를 인식해 이곳이 어디라고 말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찾는 물건도 금세 어디 있는지 알려준다. 인공지능 에이전트를 소유하게 됨으로써 ‘사물의 지능화’가 구현되는 셈이다. AI를 통해 이제 사물이 지능을 갖게 됐다는 뜻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서 I. 밀러(런던대학 과학사 및 과학철학 교수)는 창의성이 인간만의 속성이라고 가정할 근거는 없다면서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 또한 기계라고 말한다. 즉 “인간은 어떤 수준에서는 생물학적 기계이고, 더 깊은 수준에서는 화학적 기계이며, 가장 심오한 수준에서는 양성자, 중성자, 글루온, 쿼크 등의 복합체”라는 것이다. 바야흐로 사람이 서야 할 자리가 달라지려는 순간에 봉착했다.


미셸 푸코는 근대를 가리켜 ‘계몽’을 문제 삼는 시기라고 말했다. 중세를 지나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을 맞이한 근대인들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 묻고 결정해야 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근대인의 질문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셋째,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이것은 중세인이었다면 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오백여 년 전 이미 육체, 정신, 영혼의 근대화를 이뤘다는 우리가 이런 질문에 진지한 답을 내려야 할 시점에 당도했다.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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