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마로니에

나는 지금 자아통합감을 갖는

노년기 한복판에 서 있다.

절망감에 빠지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행복한 나를 만드는 교육을 그려보았다.

 

나는 팔십 중반을 넘어선 몽당연필이다. 지난 2월 24일 전북지역대학에서 386명에게 학위증을 수여하는 졸업식이 있었다. 나는 공부노익장이라고 ‘평생학습상’을 받았다. 그 대표로 단상에 올라 수상 소감으로 짧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여덟 번째로 졸업장을 받았고, 백세시대를 살아가면서 아홉 번째로 건강관리를 잘해보자고 생활체육지도과에 또 입학하게 됐습니다. 늙는 것도 모르고 바쁘게 사는 공부도둑이지요.”
졸업식장 천장 마룻대가 들썩이게 박수갈채를 받았다. 언젠가 「교육철학」 강의에서였다. 교육학 교수님은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교육이란 무엇인가?’ 자기다운 답을 한 줄로 써 보란다. 골똘한 생각 끝에 ‘공부는 동그라미 그리기다’하고 스치듯 썼다. 돌멩이가 모가 나면 구르는 데 저항을 받듯, 인간도 모난 부문을 절차탁마하면 몽돌처럼 좋은 삶이 되지 않겠나 해서다. 『맹자』에 ‘구기방심(求基放心)’이란 글이 나온다. 공부란 잃어버린 나를 찾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잠재적인 자아실현이다.
내 공부방에는 ‘욕궁천리목 갱상일층루(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란 글 한 편이 걸려 있다. 당나라 시인 왕지환의 시구다. 천리까지 보고 싶어 누각을 높이 오른다는 의미다. 중어중문학과 김성곤 교수님께서, 우연한 기회에 내게 써 준 소중한 휘호다. 방송대의 여러 학과를 섭렵한 것도 어찌 보면 이 시의 깊은 의미를 좇아, 까치발을 세워 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서였고,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일이었다. 가방끈이 짧아 5년을 다닌 초등교육학과를 비롯해 중어중문학과, 국어국문학과, 문화교양학과, 교육학과, 청소년교육학과, 농학과, 사회복지학과를 차례로 졸업했고, 지금은 생활체육지도과에서 수학하고 있다. 말하자면 21년 공부도둑인 셈이다.
교직을 은퇴하고 배낭여행을 하고 싶어 중어중문학과를 다녔다. 중국어를 익혀 아내와 둘이서 때로는 친구들을 꼬드겨 황산도 오르고, 타이완 아리산도 올랐다. 한 달간 실크로드를, 달포 간 티베트 여행도 하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떠올리면 티베트에서 네팔로 넘어가는 길목의 베이스캠프에서, 눈부신 에베레스트산을 올려본 희열감이다. 몽당연필을 발로 밀어 산꼭대기에 올려놓은 기분이라 할까, 마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상상이었다.
글쓰기 공부로 국어국문학과도 다녔다. 피천득 선생의 글 「인연」처럼 좋은 수필 한 편을 쓰고 싶었다. 유지경성이란 말이 있듯이 월간 〈공무원연금〉지 수필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고, ‘방송대평생학습에세이상’ 공모에서도 거짓말처럼 최우수상을 받았다. 난 기뻐서 대학로에 있는 꽃집으로 달려갔다. 내 나이만큼 붉은 장미 팔십 송이 꽃다발을 만들어 달라 졸랐다. 겨울철이라 장미 한 송이에 오천 원을 불렀다. 아내가 질겁하며 구원투수처럼, 상징적으로 장미 여덟 송이로 만들자고 했다. 꽃 파는 여인이 붉은 장미 여덟 송이를 하얀 안개꽃으로 받쳐 만들어 주었다. 단상에 올라 꽃다발을 총장님에게 드리면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읊었다. 관중들 속에서 박수 소리가 크고 청아하게 났다.
나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다. 채소 한 포기 심을 한 뼘의 땅도 없지만, 농사짓기 어린 시절의 향수가 있어 농학과를 다녔다. 심고 거두는 벼의 한살이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식물작물학Ⅰ」 교과서가 있었다. 내용이 미세하고 난해했지만 파고드니 점입가경이었다. 나는 배가 고픈 일제강점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벼에 대한 기억들이 생생하다. 내가 살았던 동네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벼 도정공장이 있었다. 쌀가마니를 실은 소달구지가 신작로로 지나가면 살금살금 달구지에 달라붙어, 쌀가마에 짧은 대나무 대롱을 꽂아 쌀을 빼냈다. 생쌀을 한 움큼씩 입에 물고 배고픔을 달랬던 기억도 있다. 유통이 거의 없는 오십 원짜리 동전에 벼의 문양이 그려 있다. 통일벼 이삭 그림이다. 이 품종은 소출은 많았으나 기능성에서 밥맛이 떨어진다고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논에서 벼 포기를 뽑아 와 교과서에 나와 있는 벼의 얼개와 비교하면서, 벼의 세밀화를 수십 장 그려가면서 공부에 몰입했다. 공부는 정직했다. 농학과를 졸업할 때 성적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사회복지학과에 다니면서 소정의 160시간 실습 과정을 밟았다. 당당하게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땄다. 실습을 받을 때 일화다. 노인복지기관에 모인 몸이 불편한 노인들 앞에서 “제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세요?”라고 물었더니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으로 보이네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의 수발을 받아야 할 상노인이 사회복지사로 나섰으니 어불성설이라는 말로 들렸다. 나는 사회복지학과를 다니면서 ‘선배시민’ 담론에 적극적인 동참 의지를 가지게 됐다. 노인은 ‘No人’이 아니고 ‘Know人’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존재로, 사회의 마중물이 되겠다는 봉사관이라 할까. 미시적으로는 오랫동안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내의 건강관리에 도움을 주고 싶었고, 거시적으로는 내가 받은 만큼 혜택을 사회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다.
생활체육지도과에 다니면서 학우들과 잘 어울리고 있다. 지난 6월 1일 ‘제10회 I LOVE 방송대 마라톤 축제’가 있었다. 맑은 초여름 날씨였다. 상암월드컵공원에 3천여 명의 건각들이 운집했다. 이 마라톤 축제에 나는 미운 아홉 살 손주와 같이, 건강달리기 5km 코스를 달렸다. 앞가슴에 붙은 내 번호는 3152이고, 손주는 9019이다. 아마도 나는 최고령자로 손주는 최연소자로 추측된다. 반바지에 운동화를 신었고 스마트워치를 찬 손목을, 날 보란 듯 존재감 있게 흔들었다.
사자성어 ‘부추작약(鳧趨雀躍)’이란 꼴처럼, 나는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달렸고 손주는 참새처럼 뛰었다. 뒤지고 앞지르는 발걸음들이 쓱~ 쓱~ 풀 베는 소리로 들렸다. 길섶에는 망초꽃들이 하얗게 살랑였다. 가볍게 두 발을 올렸다 내렸다 착지하지만, 숨이 차고 버거웠다. 완주의 동그란 기념 메달을 목에 걸었다. 손주와 같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사진도 찍었다. 손주에게 “우리는 친구로서 달리는 거야, 마라톤은 힘들어도 포기치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야”라고 말해 주었다. 마라톤은 끈기다. ‘손주와 할아버지가 함께 달린 마라톤’은 즐거운 추억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나는 현장에서 마라톤 완주의 기념으로, 그동안 장학금을 받아 모은 쌈짓돈, 일백만 원을 ‘빈자의 등불’이라며 학교발전기금으로 기탁도 했다. 이도 하나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닐까.
삶이 공부이고 공부가 삶이란 말이 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욕구들, 여행을, 독서를, 글쓰기를 농사짓기를, 운동을, 자격증을, 모두를 방송대 공부에서 찾았고 충족시켰다. 생각해 보면 ‘좋은 교수’에, ‘좋은 책’에, ‘좋은 시스템’을 지닌 방송대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교육자산이라고 자부한다. 이를 민들레꽃씨처럼 널리 퍼뜨리고 싶다.
언젠가 ‘역사기록관’ 영상자료 인터뷰에서 “방송대는 평생교육의 매혹적인 통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친구들은 나이 들어 공부에 집착하는 나를 보고 ‘최씨고집으로 공부하는 뚱딴지’라고 놀린다. 얼른, 친구가 고집을 방송대에서 여덟 개 학과를 졸업하고 아홉 번째 학과인 생활체육지도과에 재학하고 있다.열정으로 바로 잡아주었지만 맞는 말이다. 『중용』에도 ‘택선고집(擇善固執)’이란 말이 나온다. 좋은 것을 붙잡았으면 고집스럽게 매달리라는 함축이다.
나는 심리학자 에릭슨이 말한 성격 발달의 마지막 단계인, ‘자아통합감’을 갖는 노년기 한복판에 서 있다. 절망감에 빠지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행복한 나를 만드는 교육을 그려보았다. 구름이 두둥실 비껴가는 푸른 하늘을 올려보며 흰 머리칼을 긁는다. 뚱딴지는 죽어야 연필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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