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마로니에

올해 추석은 열매가 알찼다. 다른 해보다 햇볕이 뜨거웠던 탓일지 모른다. 아스팔트에서 지내는 우리 인간들은 복사열에 지쳐 ‘더워 죽겠다’를 반복했지만 열매가 익는 데는 그래도 괜찮은 여름이었나 보다. 여름 전반부에는 비가 많이 와서 과일이 맛이 없었는데 이후부터는 비가 그리울 정도로 날씨가 쨍해서 열매가 달다. 추석이 지난 요즘도 더워서 아직은 여름 느낌이지만 풍성한 추석 상차림을 대하니 가을이 왔다는 반가움이 있다.


사실 식물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도 목이 마르고 뜨거운 볕이 부담스러웠을 게다. 그래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낸 식물들에게 고맙다. 봄부터 여름을 거쳐 가을까지 달려온 그들의 행보가 남일 같지 않다. 신비로운 보름달과 만나는 가을 문턱에서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돌아본다. 요즘엔 부끄러움이 많이 늘었다.

 

어떤 상황이 닥칠 때 ‘어제의 내’가 창피해진다. 세상일이란 게 고만고만하게 돌아가다 보니 보통의 우리가 겪는 일도 몇 가지로 분류된다. 억울한 일, 화나는 일, 신나는 일, 섭섭한 일, 싸울 일 등 비슷한 상황에 놓일 때가 많은데 몇 년 전, 몇 달 전, 며칠 전의 내가 그 일에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문득 떠오르면 쓴웃음이 지어진다.


그게 그렇게 악을 쓸 일이었나? 아유, 그냥 한 번 픽 웃고 말 걸, 뭘 그리 꼬치꼬치 따졌지? 내키지 않는 일이면 나서지 말지 굳이 했어야 했나? 그 사람이 꼭 나처럼 생각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후회와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그 생각을 하고나서 곧바로 어느새 부끄러울 일을 또 하나 만들고 있는 나를 본다. 이파리 하나 떨구고 났더니 다시 새 잎이 돋듯 나도 반성과 실수를 무한 반복한다. 언뜻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배워야 되는 거구나!


우리네 조상님들은 ‘수신(修身)’을 중시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겨울날 얇은 얼음을 밟듯이 숨죽여 조심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하루의 생각과 언행을 돌아보았고 정적 가운데서 깨끗한 기운을 길러 세상일에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수신’이야말로 평생 힘써야할 공부로 여겼다. 수신은 삶의 뿌리와 둥치를 든든히 하는 일이다. 태풍이 오거나 해충이 들 때 나무는 생의 고난에 봉착한다. 생사의 갈림길에 들기도 한다. 하지만 뿌리와 둥치가 탄탄하다면 그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다.


미국 세콰이어 국립공원에는 자이언트 세콰이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키 100미터를 훌쩍 넘는 이들은 3천 년에서 4천 년에 이를 정도로 아주 오래 산다. 미국 서부 지역은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데, 이 나무들은 두꺼운 수피(樹皮)속에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어서 단열효과가 있다. 둥치를 손으로 누르면 스펀지처럼 푹신하고 탄력 있다. 그래서 불길이 둥치를 뚫고 들어와도 끄떡없다. 게다가 산불이 나면 솔방울이 열려 씨앗이 싹튼다. 산불은 이들에게 보약같다. 그래서 관리인들은 정기적으로 숲에 불을 낸다.


자이언트 세콰이어의 장수 비결은 둥치에 담긴 수분이다. 산불 같은 생의 시련을 버틸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다. 나무가 지닌 든든한 뒷심이고 오랜 세월 수신의 결과다. 요즘은 인간 수명도 길어졌다. 예전에는 육십갑방송대 농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유학과 식물의 접점을 찾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자를 한 번 돌리기 전에 죽기가 일쑤여서 환갑잔치가 축복이었는데 지금은 ‘두 갑’을 돌리게 생겼다. 

 

 배우고 또 배워서 둥치에 수분을 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어떤 어려움과 힘든 상황에도 느긋이 대처할 수 있다. 나무가 생의 멘토다. 수 백 년 수 천 년을 사는 나무와 친하게 지내면 수신도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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