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두름하면 안 된데이”
내 어렸을 적, 어머니가 수(繡)를 놓을 때 가끔 하시던 말씀이다. 이 말인즉슨, ‘밋밋하면 안 된다’는 뜻의 아랫지방 사투리다. 손수건이나 자식들 겉옷에 색실로 작은 문양을 바느질하던 소일이 가내부업으로 커졌다. 그 당시, 집안에는 원단 말은 심지가 노상 널브러져 있어 작은 방이 더 좁게만 느껴졌다. 그게 미안하셨던지 어머니는 수놓은 옷들을 입히시며, 사람은 밋밋하지 않아야 한다고 흘리듯이 말씀하셨다. 요즘처럼 화려한 무늬의 옷이 흔치 않던 시절이다. 이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선지, 나는 어려서부터 궁리 좋아하고, 유난스러웠다. 덕분에 내가 무시로 벌이는 사건·사고들은 마치 하얀 천 위에 프린트한 오색 문양과 같았다.
가끔 동네 뒷산에서 친구들과 불장난에 골몰하던 유년이 있었다. 겨울 끄트머리에서 봄기운은 감감할 때, 온기에 굶주린 악동들은 산기슭의 마른 가지들을 주워다가 불을 지펴 후끈함과 포근함을 채웠다. 지나가는 어른들이 내일 아침 이부자리에 오줌을 지릴 거라고 겁을 주셔도 귓등으로 넘기던 아이들이다. 어쨌든 장난이 거듭될수록 불놀이는 점점 대담해졌다. 드디어 내가 성냥 공급책을 맡던 날, 우리는 엄청난 불을 지르고야 말았다. 근처 동네 남자들을 죄다 동원해서야 산불을 끌 정도였으니 그때치곤 꽤 큰 불이었다. 나는 겁에 질렸고, 이내 급우의 비싼 잠바를 벗겨 닥치는 대로 불을 끄다가 그만 옷까지 홀랑 태워 먹고 말았다. 그날 저녁, 우리 집에 들이닥친 친구 어머님은 방화 주동에다가 값진 의류 훼손까지 얹어 우리 어머니를 몰아세웠다. 어머니는 군말 없이 옷값을 치르면서도 의외로 내게는, “그럴 수도 있지….” 하시며 덤덤하셨다. 며칠 후 어머니는 등굣길의 나를 돌아 세워 놓고, 딱 한 말씀만 하셨다. “장난도 책임질 수 없으면 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가!" 나는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 용서를 구했고, 한동안 속죄하는 마음으로 근신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좌충우돌은 그리 쉬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늘 앞장서 손짓하던 시간은 강물 위를 스치는 쾌속선처럼 순식간에 지나쳐 버렸다. 또한 그렇게도 부산하기 그지없던 ‘시간 열차’에 실린 사건·사고의 적재중량이 한결 가벼워지면서, 나는 소년의 고치를 서서히 벗어갈 수가 있었다. 마침내 학업을 마치고 더 큰 미래를 향해 도움닫기를 시작할 때다. 돌연 그런 청년기의 나에게 뜬금없는 고질병의 전조가 보였다. 그것은 일종의 ‘회상 나들이’다. 나는 일정 주기로 예전 살던 곳이나 근무지를 찾아가곤 한다. 어린 시절의 잦은 이사가 부추긴 면도 있겠지만, 직업군인의 일상에서 이런 증세는 자연스레 반복됐다. 결혼해서도 새 터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나는 어김없이 내 살던 곳을 몽유환자처럼 다녀온다. 이런 행태가 해마다 제례인 양 굳어가자, 급기야 아내도 나의 기벽을 가히 병적이라고 단정했다. 아마도 이 귀소 본능은, 친구들이 모두 대학에 입학하고, 나만 사관학교로 진학하면서 낯선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자의식 탓인 것 같다. 생도 1학년 첫 휴가 며칠을 어릴 적 동네의 회색빛 한옥 담장과 좁디좁은 골목길 사이를 헤매고 다녔다. 그렇게 내가 저지른 사건·사고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두 분의 머리맡에서 발견한 내 죽음에
지레 겁이 난 거다. 게다가 그간 그렇게 찾아 헤맸던
추억의 공간들이, 한 움큼의 주먹 사이로 빠져나가는
고대 사원의 바스러진 파편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흘러가 버린 시간이 소멸에 불과한 거라면
도대체 회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언제부턴가 지나간 시간을 사유하며, 그때 그 공간들을 떠도는 놀이에 변화가 왔다. 중년에 접어들어 조문이 치레가 되면서, 망자인 그때 그 사람을 대하는 의미가 진지해졌다. 그런 연장선에서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이들을 기억 속 공간으로 소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40여 년 전 초등학교 동무의 현재가 궁금했다. 무엇보다 우리 삶에서 추억으로 옮겨 놓던 그 장소와 그 사건을 그네들이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가 더 알고 싶었다. 나름의 수소문 끝에 옛 친구들과의 해후는 이루어졌지만, 거듭되는 만남에도 불구하고 추억 늘어놓기는 오히려 흥미를 잃어갔다. 아마도 거기에는 함께한 시간을 놓고, 겉도는 회상이 서로 다른 해석과 엇갈린 시선을 그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결국 상봉은 짧아지고 유희는 흐지부지해졌다.
어느결에 또 다른 ‘시간 열차’가 달려오더니 장년의 나이테 위에서 잠시 운행을 멈췄다. 이를 틈 타, 나의 젊은 시절 인연들에 대한 회상이 숨을 돌렸다. 그제서야 나는 지난 삶에서 과거의 시간이 던져주는 의미에 골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돼,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는 사건과 마주하면서 시간에 대한 나의 각성은 한층 깊어져만 갔다. 돌이켜 보건대, 지금까지 나는 회상 나들이에서 언제나 무대 밖 관객처럼 관조와 관음의 회색 지대를 오가는 제삼자였다. 그런데 막상 맞닥뜨린 풍수지탄 앞에서 누군가가 나를 무대 위로 올려놓고 시간이 규정한 죽음을 따져 묻는 게 아닌가.
“시간이란 게 회상이 아니라면 그저 소멸이었냐?”고 말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이어지던 일상에서, 나의 두 분은 레테의 강 너머에 계신다. 나는 근 3년 넘게 피안의 존재인 두 분을 나의 시간 속에 가둬놓고 있다. 어떤 이는 그게 진정한 애도라고 점잖게 위로한다지만 솔직히 그런 게 아님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보다는 두 분의 머리맡에서 발견한 내 죽음에 지레 겁이 난 거다. 게다가 그간 그렇게 찾아 헤맸던 추억의 공간들이, 한 움큼의 주먹 사이로 빠져나가는 고대 사원의 바스러진 파편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흘러가 버린 시간이 소멸에 불과한 거라면 도대체 회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란 말인가?
오래전부터 시간은 나의 삶에서 수놓는 틀을 빌려줬다. 그 옛날 어머니가 밋밋하게 살지 말라 하신 것처럼, 유년에는 ‘사건·사고’라는 색실로, 청장년에는 ‘목표’라는 문양이 형형색색의 다채로움을 자아내 준 판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판에서 함께 했던 부모님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저 또 다른 시간의 수틀이 얹히는 게 당혹스럽고, 누군가의 붓질이 그분들과의 추억을 흐릿하게 하는 것에 속수무책이다. 그 자리에는 ‘휑함과 텅 빔’만 남았다. 무엇을 더 단단히 붙들어야 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다. 새해가 되어 책장을 정리하던 중, 무심코 손에 쥔 책들에서 오래 묵은 종이 향과 먼지 내음을 맡았다. 특히 어느 책인가는 주인공에게서 그가 살던 시대의 비릿한 피 냄새와 사막의 서걱서걱한 모래 향이 났고, 유태인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생존한 저자의 빛바랜 사진에서는 공포에 절은 내음이 났다. 이번엔 몇 개월 전부터 읽어왔던 김수영 시인의 산문집을 꺼내봤다. 시인은 책에서 양계장을 운영한 적이 있다 하고, 특히 그의 주벽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그래선지 닭 내와 막소주 향이 어우러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잠시 정리를 미루고 향과 함께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 ‘어쩌면 책 속 인물들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저마다의 향기가 있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코 책 지지대 사이에 있던 저금통이 떨어지면서 몇 개의 동전들이 책장 바닥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동전 몇 닢을 꺼내려고 플라스틱 자를 방바닥과 책장 밑단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 참 많이 하던 행동이다. 우리 때는 돈이 귀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돈을 쥐여주는 적이 잘 없었다. 주전부리나 만화방에 갈 푼돈을 구할 때는 꼭 이런 방식을 썼다. 긴 총채를 방바닥에 납작 드리우고 장롱 밑을 지뢰 훑어내는 식이다. 그마저도 수확이 신통찮을 땐, 나는 농 안에 걸린 아버지 양복 호주머니를 공략했다. 거기엔 가끔 아버지가 버스 요금이나 물건 사시고 남은 잔돈들이 아무렇게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변통할 때, 아버지 옷에서는 뭔가 묵직하면서도 마른 나뭇가지 타는 냄새가 났던 것 같다.
이 갑작스러운 50년 전의 기억 속 향내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계셨던 요양원 쪽으로 나를 끌고 갔다. 그리고 느닷없이 그간 나도 모르게 철저히 밀봉했던 그곳의 내음이 터질 듯이 뿜어 났다. 임종 직전까지 아버지의 몸은 요양원의 포르말린 냄새와 노인 특유의 텁텁함으로 뭉쳐 있었다.
이제 비로소 나는 지난날의 수틀을 제대로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나에게선 어떤 향기가 날까?
약간의 욕심을 내어 사뭇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이 훗날 그 누군가를 위해 나의 향을 내어보는
첫째 날이 되기를 조심스럽게 소망한다.
아버지는 80년대 군사정권 시절, 공직에서 쫓겨나셨다. 성장기의 4남매 앞에서 중년의 가장은 실직을 쉬 드러내지 못했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어찌어찌 생활을 꾸려 가셨다. 아버지는 그 후로도 옳은 직장을 한 번도 가지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40년을 늘 집에서 바둑과 책 읽기로 보내셨던 아버지를, 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다 부모님을 뵈러 갈 때는 만면의 웃음을 안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떠나올 때는 절 향내 같은 꿉꿉함을 털어내듯이 문을 거칠게 밀고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머니 표현을 빌리자면, 아버지는 스스로 퇴직 후의 삶에 수놓기를 마다하신 게 맞다. 그저 무위도식하며 더 이상 세상에 나가기를 거부하셨던 거다. 권력에 몸담으셨던 경험으로 시대가 바뀌었음을 눈치채시고, 간혹 다른 이들의 변신을 타협이라고 경계하셨다. 특히 함께했던 동료들이 어구를 한곳에 쳐 놓은 상황이 바뀔 때마다 다른 옷으로 바꿔 입는 모습에는 많이 언짢아하시기도 했다. 한 번은 자신의 경제적 무능함을 놓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게 듣기 싫으셨던지, 돈벌이랑 당신은 애당초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둘러대신 적도 있다. 젊은 날의 나는 그런 아버지가 스스로 자신의 그릇을 재단해 가장 안전한 방편을 택하신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세상의 얕은 꼬임에 미혹되지 않고, 주어진 여건 속에서 검박하게 살아가셨던 아버지의 처신이야말로 ‘밋밋하게 살지 말라’던 어머니와는 다르게, 민무늬의 무채색 삶에 자족하셨던 분으로 비쳤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아버지의 향기를 조심스럽게 더듬어 본다. 그렇게 찾아낸 향기가 뜻밖에도 제철공장에서 나는 비릿한 쇳내였다. 벌겋고 노랗게 타오르는 뜨거운 불덩어리에서 반투명의 황금색을 띤 철을 만들어 낼 때의 그 내음. 가까이 다가가면 숨 막힐듯한 시큼함과 함께 불꽃 튀는 순간에 맡아지는 용광로 냄새가 아버지 향기였다.
비로소 모양에만 집착했던 나의 시간이 향기로 대체되고 있음을 알아챘다. 어릴 적 시간은 항상 내 앞에 나타나서, 내 어깨 너머로 지나가는 선형적이고, 순차적인 도미노였다. 그렇게 줄지은 ‘시간선(線)’에 색깔을 입히고, 모양을 갖추게 하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 믿었다. 더불어 그 속에서 쌓아 올린 채색과 문양 위주의 여러 가지 경험이야말로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아낸 자의 표상으로 여겼다. 그러다 보니 고난 끝에 성취한 스토리텔링을 되돌아보는 회상은, 일종의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거다. 삶에서 유형의 모습보다 무형의 내음이 소멸과 죽음의 숙명을 넘어서게 한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상(像)에 앞서 향(香)이 있는 삶을 놓치고 있었던 거다. 그제서야 새해 벽두, 책들이 품고 있던 향기들뿐만 아니라 세상과 담쌓았던 나의 아버지가 알려주시고자 함이 무엇인지 확실해졌다. 사람의 향기는 은은히 풍겨와 기억할 때마다 우리 곁에 남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비로소 나는 지난날의 수틀을 제대로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나에게선 어떤 향기가 날까? 약간의 욕심을 내어 사뭇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이 훗날 그 누군가를 위해 나의 향을 내어보는 첫째 날이 되기를 조심스럽게 소망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떠나신 지 3년이 지난 오늘, 문득 당신께서 내게 남기지 않으셨던 마지막 말씀에 귀 기울여본다.
“사람의 향은 스스로 내어주는 게 아니라, 그것을 맡고자 하는 이의 몫이란다.”
송명흡 국어국문학과 1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