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김옥렬의 미술로 읽는 세계사 : 시대감성과 미술의 눈]

‘평등 없는 자유와 자유 없는 평등’ 사이에서 인간은 어떤 관계로 삶을 구성해 왔을까. 프랑스인은 이미 신민에서 시민으로 자유와 평등을 획득한 경험이 있었다. 이러한 전통을 가진 파리의 시민에게 황제를 구심점으로 하는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 구체제)은 발붙일 곳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인 프랑스를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 패배하고, 이어진 파리 코뮌으로 프랑스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프랑스는 집정정치, 제1제정, 왕정복고, 7월 왕국, 제2제정, 제2공화정에서 제3공화정까지 일곱 번의 체제 변화를 겪었다. 19세기의 변화는 유럽뿐 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진행됐다. 청과 조선 그리고 일본을 비롯해 세계가 근대사회를 향한 격동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엄청난 희생을 통해 이룬 유럽의 근대사회는 시민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그 어느 시대보다 빠르게 변화시켰다. 근대미술의 중심 도시였던 파리는 농민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무엇보다 1870년대 이후 증기선이나 기차보다 빠른 자동차의 등장으로 속도의 변화, 교육과 신문을 통한 견문의 확장, 전화나 전신을 통한 통신의 변화는 일상생활뿐 아니라 과학과 종교에 대한 인식도 재편했다. 1870년대 파리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전통에 도전하는 전위적인 화가들로 미술의 전환점이 되는 변화를 시도했지만, 당시 프랑스의 아카데믹한 양식을 추구하는 화단의 보수 세력인 앵스티튀 드 프랑스(Institue de France, 프랑스 학사원)와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 미술 전문 교육기관) 그리고 살롱(Le Salon, 젊은 미술가들의 등용문)에서는 시대적 흐름과 달리 아카데믹한 양식(주제나 형식면에서 역사적 주제와 정확한 소묘)을 선호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독창성이 강한 그림을 그리는 젊은 화가들이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낙선하거나 혹독한 비판과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유난히 낙선이 많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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