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대출판문화원(원장 박지호)은 2025학년도 1학기에 신규 교재 10종을 내놨다.『옛 수필의 세계』(국문),『노동법 Ⅰ』(법학),『행동경제학』(경제),『쉽게 이해하는 법인세: 이론과 실무』(경영),『나눔의 예술』·『후배시민론』(사회복지),『의류소재염색』(생활과학),『학교교육과 청소년』(청교),『디지털교육』(유아),『서구지성사입문』(문화)이 그것이다. 특히 문화교양학과 2학년 과목으로 개설된 「서구지성사입문」은 역사학의 일부로서 정치사상사, 지성사를 조망할 수 있는 흥미로운 과목이다. 11명의 저자가 공동 집필했으며, 이우창 교수가 6개 강의를 진행하고 나머지 9개 강의는 이 교수가 해당 부분 집필자와 대담하는 방식으로 강의가 진행될 예정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과목 개설자이자, 교재 대표 집필자인 이우창 교수를 만났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서구의 사상과 담론에 관해서는
여전히 너무 낡은 이야기들이
유통되고 있고요. 그것들을 갱신해 서구 근대를,
궁극적으로는 우리 세계를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는 것도
이 과목의 중요한 목표입니다.
과목 명칭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한편으론 왜, 지금 ‘서구지성사’인가?라는 물음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이 과목을 개설하신 이유, 목적이 궁금합니다
일차적인 이유는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 분야를 좀 더 많은 학생에게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적인 의미의 지성사 연구를 개척한 이들로 보통 “케임브리지 역사학파”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1960년대 이래 영국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점차 활동반경을 넓혀왔고, 2000년대 이후에는 미국과 유럽의 여러 학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요즘엔 이전까지 특별히 지성사 연구에 관심이 없던 학자들도 자기소개를 하면서 관심분야에 ‘지성사’를 추가할 정도입니다.
저는 10년쯤 전 박사과정 중에 우연히 지성사 연구를 처음으로 접하고 곧바로 그 가능성에 매료되었습니다. 문제는 한국어로 공부할 수 있는 자료가 너무 없고, 사람들도 지성사가 정확히 어떤 연구인지 잘 모르더라고요. 한국의 서양사·정치사상 연구자들은 주로 미국과 유럽의 동향에 관심을 쏟다보니, 영국 학계의 흐름에는 상대적으로 낯선 측면이 있는 거죠. 한 명씩 붙잡고 설명하다가 차라리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게 낫겠다 싶어 리처드 왓모어(Richard Whatmore)의 『지성사란 무엇인가?』(오월의봄, 2020)를 번역 출간했습니다. 대학원생이나 연구자에겐 반응이 꽤 좋았는데요, 아무래도 역사학 방법론을 다루는 책이다 보니 좀 더 넓은 독자를 위한 ‘입문’의 통로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한 문제의식이 지성사 연구가 실제로 역사서술을 어떻게 바꾸었는가를 보여주는 「서구지성사입문」 과목의 신설로까지 이어진 거죠.
좀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서구 근대를 직시해야만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기분 좋은 사실은 아닐 수 있지만, 결국 오늘날 한국, 나아가 세계 자체의 변화나 위기를 설명하고자 할 때 서구 근대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잖아요? 아쉬운 점은 한국 사회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서구 근대의 상(像)이 지나치게 낡고 피상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관련 전공자로서 말씀드리면, 서구 역사학계는 지난 수십 년간 근대세계에 관한 기존의 통념을 바꾸는 연구가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게 축적해 왔습니다. 그 결과 몇십 년 전까지 ‘교과서적 지식’이었던 것 상당 부분은 이제 더는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로 비판받고 있죠. 문제는 한국의 서양 연구가 규모도 작고 지원도 부족하다 보니 이렇게 업데이트된 논의가 매우 제한적으로만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연구자가 적은 사상·담론의 역사는 서구 학계와 한국의 격차가 너무 커서 어디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를 정도예요. 따라서 이를 갱신하여 서구 근대를, 궁극적으로는 우리 세계를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는 것도 이 수업의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홍보 차 덧붙이면, 올해 2학기에 문화교양학과에서 새로 개설될 「인물로 본 근대」 과목도 유사한 목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번 학기 문화교양학과 2학년 과목으로 개설됐는데, 문화교양학과 재학생이 아니어도 수강이 가능할까요? 교재 『서구지성사입문』은 교양 차원에서 일반 독자들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입니다! 처음 기획 단계부터 집필자 선생님들께 ‘방송대만이 아닌 전국 어느 역사학과에서도 교재로 채택할 수 있는 책’을 만들자고 말씀드렸죠. 문화교양학과 학생이 아니라도 사상이나 정신의 역사, 정치, 서양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재밌게 들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이쪽에 관심은 있는데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걱정하시는 학우님들의 문의도 종종 받는데요, 「서구지성사입문」 과목은 당분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모두 서평 과제물로 진행할 예정이니 시험공부 걱정은 너무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무엇보다도, 『서구지성사입문』 집필진은 지금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로 이루어졌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진지하게요.
머리말에서도 밝히셨지만, ‘좋은 입문서를 쓰기라 상상 이상으로 까다로운 과제’일 것 같습니다. 교재 『서구지성사입문』도 여러 학자가 참여해 집필하셨는데, 이 책이 입문서로서 갖추고 있는 미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두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교재가 서구의 역사 전반을 부분적으로나마 조망할 수 있도록 고대 그리스부터 21세기 신자유주의·포퓰리즘까지 다양한 시대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재 특성상 총 15장으로 구성되어 이번에 담지 못한 주제도 여럿입니다만(교재를 받지도 못했는데 벌써 6년 뒤 개편방향을 고민하고 있지요!), 이 정도의 시간적 길이를 한 권에 담아내는 지성사 입문서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처음이지 않을까 합니다. 두 번째는 한편으로 익숙한 통념을 바꾸면서도 독자에게 가급적 친절하게 다가간다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제에 따라 때로 서술이 다소 밀도가 높게 느껴질 수 있는데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멀티미디어 강의는 좀 더 요점 위주로 쉽게 풀어내고자 합니다.
교재 구성과 관련해 전체 15장(플라톤의 『국가』에서부터 냉전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까지)으로 모두 11명의 학자가 집필에 참여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필자가 참여해 지성사의 일관된 흐름을 읽어내기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서로 시각도 다양할텐데, 어떤 방식으로 교재 15장 구성과 같은 사상의 흐름을 잡아냈는지요
보통 정치사상사 교과서는 몇 가지 핵심적인 키워드를 정하고 그에 따라 사상의 역사를 쓰는 방식을 채택하는 편인데요, 그런 배치가 유용한 점도 있지만 지성사적 혹은 역사적 접근법이 갖는 풍부함을 살리기에는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시대가 달라지면 사람들이 사상과 정치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도, 나아가서는 ‘정치’라는 범주 자체를 규정하는 관점까지도 변하곤 하니까요.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정말 중요하죠. 그래서 일관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우선은 시대별로 주요한 주제와 흐름을 선별하고, 그 뒤에 실제 원고 집필·수정 단계에서 그것들이 느슨하게라도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 두고자 했습니다. 한두 개 주제로 전체를 관통하는 직선을 긋기보다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된 여러 주제의 결합체를 보여주는 게 좀 더 수강생의 지성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으면 너무 낭만적일까요?(웃음)
지성사를 다룬 기존의 책들은 정치사상을 중심에 놓고 접근했습니다. 정치사상을 다루지만, 사상의 역사이기에 ‘역사학’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정치사상사나 지성사 연구가 역사학과 밀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우리가 정치사상사나 지성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어떤 점을 눈여겨봐야 할까요
중요하고 까다로운 질문이군요. 지성사 연구자들이 사상을 역사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보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상이, 또 사상을 만들어내고 활용하는 사람들이 허공에 붕 뜬 존재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상가들은 각각 그들이 살아가는 시공간의 여러 요인과 상호작용하는 존재고, 그들이 남긴 말과 글 역시 그것이 속한 세계의 여러 요인과 연결되어 있는 대상인 것이죠. 따라서 지성사가들은 과거의 사상을 이해할 때, 또는 심지어 우리 동시대의 사상을 이해할 때도 그것이 어떤 맥락과 논쟁 속에서 어떤 전략과 의도를 위해 만들어졌는가를 보려고 하죠. 우리가 지성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바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성사적 감각이란 지금 우리 자신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말과 생각이 원래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는지를 질문하고, 그러한 말과 생각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능하게 또 불가능하게 만드는가를 이해하려는 태도와 거의 같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교훈으로 나아가자면, 요즘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내 편인지 아닌지,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인지 여부에 따라 너무나 쉽고 빠르게 판단을 내리도록 유혹받는 시대잖아요. 꼭 정치적인 주제가 아니라 해도요. 지성사가들은 그렇게 이미 정해져 있는 ‘나’의 관점에서 만사를 재단하는 대신, 설령 당장 거슬리고 동의할 수 없다고 해도 우선은 ‘남’의 주장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를 가능한 면밀하고 정확하게 헤아려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러한 태도에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주변의 견해에 휩쓸리지 않고 사태를 끝까지 바라보는 냉정함과 현명함,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감 같은 미덕 말이죠.
3월부터 방송대학보〈KNOU위클리〉에서도 교재 내용의 이해를 돕는 ‘서구지성사입문 연재’를 시작할 계획입니다. 단행본 교재와 달리 학보 연재에서는 어떤 점에 더 무게를 두실 예정인지요
일단은 원 교재에 비해 매우 한정된 지면에서 풀어나가야 할테니, 요점을 간결히 짚으면서도 짧은 지면 내에서 재밌게 읽히는 글이 되도록 하는 게 중요하겠죠. 말씀드리고 나니 뻔한 답변입니다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사실 저는 각 필자의 개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편이라 대략의 목적과 유의 사항만 말씀드리고 지켜보는 편인데요, 그렇다 보니 저도 다들 어떤 글을 쓰실지 궁금합니다(웃음). 모쪼록 연재를 통해 더 많은 학우님께서 지성사를 향한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