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금년 광주·전남지역대학 입학식에서 최고령(85세) 최다학과(11) 학우로 소개돼 박수를 받았다.
다들 “평생교육을 해야 한다”라고 말을 한다. 또 공자님 말씀처럼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아(不亦說乎也)’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 말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다. 남에게만 듣기 좋게 하려는 말이다. 요즘 말로 내로남불이다. 그래서 나는 말로 하지 않고 남에게 권장하지도 않고 그 말을 미련하게 그대로 실천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 그게 박수받을 만한 일인가?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캠퍼스 없는 방송대에서 4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82년 5년제 초등교육과를 입학해 1987년 졸업했을 때다.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딱지를 떼고 대학 졸업생이라는 명예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 여력으로 유아교육과를 5년 만에 졸업하고 바로 일본학과에 편입했지만, 당시의 출석수업 어려움과 학업성적 불량 때문에 7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바로 정년퇴임을 했다. 정년퇴임 후에 삶을 즐기면서 보람을 찾는 곳을 찾아보았다. 대학부설 평생교육원이나 구청에서 주관하는 각종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배우며 서로 낯 모르는 동료들과 어울리는 기쁨도 있었고 그만큼 눈에 보이는 숙달된 기능도 있어서 2년 동안을 즐겼다.
문제는 동료들과의 어울림이 없어 나 혼자 노는 고적감(孤寂感)이었다. 마치 손에 모래를 쥔 것처럼 서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배움은 있어도 끈끈한 학우라는 의식이 없었다. 퇴임 후 2년 만에 다시 방송대 문화교양학과의 문을 두드렸다. 지난날 일본학과에서 힘들었던 경험을 되살려 철저히 시간 관리를 했다. 그러기 위해 나만의 자기 주도적 학습을 실현하기 위해 방송대 달력을 만들어 과제물, 출석수업, 동아리활동, 중간·기말평가 등 철저한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렇게 시간 관리를 해서 졸업한다면, 노후는 언제 즐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노후를 즐기면서 배우자, 그게 필자가 ‘방송대를 선택한 이유’라는 결론을 얻었다.
진리는 가까이 있다. 내 주위의 학우들은 거의 40~60대가 주류를 이룬다. 그 속에 망구(望九)의 나이를 가진 내가 서성이고 있다. 나이는 숫자지만 몸은 반드시 숫자에 따라 살지 않을 수도 있다. 젊음 속에 녹아든 노년은 숫자를 거슬러 그들과 동화해서 활동한다면 나도 젊다. 마중지봉(麻中之蓬: 선량한 사람과 사귀면 그 감화를 받아 자연히 선인이 된다는 사자성어)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방송대라는 삼밭에서 그들과 어울린다면 나는 노인이 아니다. 젊은 청춘이다. 그래서 방송대는 노년들에게 젊음을 가져다주는 회춘의 장소가 아닌가 싶다.
회춘이란 별것 아니다. 관계이고 어울림이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처럼 동년배와 놀면 그들과 닮는다. 그러니까 마음은 청춘이라고 하면서 자꾸 젊은이들을 피하려 든다. 노인복지관에서 시간을 보내면 노인이 된다. 그러나 방송대는 노인들에게 젊음을 가져다준다. 방송대에서 놀면 젊어진다.
금년 2월에 졸업하고 그만두고 싶어도 마땅히 함께 놀아 줄 친구들이 없어 두려웠다. 그래서 같이 놀아 줄 젊은 친구를 찾아 생활체육지도과에 입학했다. 입학을 축하하는 후배들이 나를 반겼다. 그리고 나는 그들로부터 진정한 박수를 받았다. 젊은 학우들이 나를 부르기에 ‘그만두고 싶다’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고 싶다’로 마음이 바뀌었다. 그게 전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