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아는 분께 통찰력 깊은 말씀을 들었다.
부모는 자식을 통해 삶을 ‘다시 사는 것’이라고.
지금 삶이 고달파도 미래의 자녀와 이를 통해 ‘다시 사는’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이 존재하는 한,
사람들은 기꺼이 자녀를 통해 다시 사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자타공인 세계 최저에다, 과거 관련 대책으로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었으나 ‘백약이 무효’였음은 모두 아는 진부한 사실이니 새삼 반복 않겠다(작년 출산율이 미미하나마 반등했다니 불행 중 다행!). 여기서는 ‘왜 무효인가’에 관해 나름 전공을 살려, 경제적 관점에서 잡다한 단상을 적어본다.
부모 입장에서 출산과 육아는 일생일대의 ‘지출’이다. 한편 이러한 지출은 당장 현재의 효용이 아닌, 지극히 불확실(?)하나 먼 미래에 자녀가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되는 다양한 형태의 효용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 관점에서 출산과 육아는 지출 중에서도 소비보다는 ‘투자’에 가깝다. 이처럼 출산과 육아를 투자의 일종으로 보면, 굳이 가족경제학까지 몰라도 아이를 낳는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경제주체는 자동차, 분양주택과 같은 내구재 또는 자본재에 투자할 때, 그로부터 미래에 발생할 것으로 기대되는 편익 및 효용과 투자에 소요되는 대출이자 등 비용을 서로 비교해 투자를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부모는 자녀로부터 미래에 발생할 것으로 기대되는 효용과 출산 및 육아의 비용을 비교해, 효용이 비용보다 크면 자녀를 낳고 키울 것이다. 따라서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결국 아이를 낳고 키우는 ‘기쁨’과 같은 출산과 육아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반면, 관련 비용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그간 우리나라 저출생 대책을 보면 대부분 출산 및 육아 비용을 줄이는 정책이 압도적이고, 효용 극대화 즉 아이를 낳고 키우는 기쁨을 높이는 정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각종 출생·육아 관련 수당과 난임치료비 지원 등 현금성 지원은 물론이고, 육아휴직 확대 및 근무시간 유연화를 통한 일·가정 병행, 보육비 지원과 보육시설 확대, 신혼부부 주거비 지원 등 대부분 비용을 줄이는 정책 일색이다.
비용지원 정책이 전부 쓸모없다는 게 아니다. 게다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기쁨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목표를 위해 정책을 고안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십수 년간 수백조 원을 비용지원 정책에 쏟아부어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면, 문제는 정책의 ‘방향’에 있는 게 아닐까? 말하자면 ‘이 정도 돈이 들면 키울 만하다’가 아니라, ‘아 이러니까 애를 낳는구나’하고 느끼도록 해줄 수는 없을까? 일반적인 자산에 투자할 때도, 사람들은 대출이자가 싸서가 아니라 투자가 앞으로 유망할 때 비로소 ‘투자할 결심’을 한다. 중도금 무이자에 발코니를 무료로 확장해 준다 한들, 깡통주택이 될 만한 아파트를 누가 분양받을까?
최근 방영된 한 다큐멘터리에서, 저출생 해결을 위해 우리 사회가 버려야 할 것으로 가장 많은 전문가가 꼽은 것은 다름 아닌 과도한 ‘경쟁’이었다고 한다. 지나친 경쟁이 남과의 ‘비교’를 부추기고 경쟁에서 낙오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야기하며, 이는 사회 전체를 불행하게 만들어 저출생 문제를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도 불행한데, 하물며 아이를 낳아 또 불행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즉, 이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키우려면 결국 자신과 미래의 자녀가 행복하거나 적어도 불행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이 존재해야 함을 의미한다.
일전에 아는 분께 통찰력 깊은 말씀을 들었다. 부모는 자식을 통해 삶을 ‘다시 사는 것’이라고. 지금 삶이 고달파도 미래의 자녀와 이를 통해 ‘다시 사는’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이 존재하는 한, 사람들은 기꺼이 자녀를 통해 다시 사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사람은 희망이 있는 한 다시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