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고향이 없지. / 잃은 것도 잊은 것도 아닌 그냥 없을 뿐이야.”
필자의 시 「피터래빗 저격사건」의 이 구절을 많은 사람들은 은유적인 표현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은 환유도 직유도 아닌, 말 그대로의 진술이다.
필자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서울의 풍경은 기억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중·고등학교 시절 신촌 로터리와 연세대학교 사이 퍼져있던 최루탄 가스 냄새와 신촌 기차역에서 출발하는 경의선 기차를 타고 백마역에서 내리던 대학생들 모습. 이대 앞 옷가게들과 리어카 매대에서 파는 유행가 모음의 카세트테이프와 과일들, 가방에 매다는 아기자기한 키링들 같은 기억들은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필자의 태생은 서울이지만, 세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아버지 고향인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 와서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자랐다. 필자가 다니던 일산초등학교는 지금 구순이 넘은 우리 큰아버지도 다니셨던 학교였다. 팔순이 넘은 아버지가 그 학교의 33회 졸업생이었으니, 거의 130여 년이 넘은, 일제강점기 때 소학교로 개교한, 제법 역사가 깊은 학교였다.
그렇지만 6학년 2학기 때 서울 마포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돼, 유년의 모든 시절을 보낸 일산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쉬웠다. 아직도 학교 옆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남아있는 100년이 넘은 은행나무와, 학교 앞으로 지나가는 경의선 철도와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며 철도 건널목에 서 있던 아이들과 흰 칼라에 까만색 교복을 입은 언니 오빠들, 건널목 옆 떡볶이와 꽈배기를 파는 판잣집 가게, 그 가게를 지나면 펼쳐지던 논길이 눈에 훤하다.
필자 또래의 많은 이들처럼 필자가 살던 고향도 정말로 꽃피는 산골이었다. 복숭아꽃, 살구꽃은 없었지만, 봄에는 아기진달래가 지천이었던 곳. 가을에는 등하굣길에 흰색, 분홍색의 코스모스가 잔뜩 피어있는 논길을 지나 은사시나무와 밤나무와 도토리나무가 있는 언덕을 넘어가면 우리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던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다. 국토가 남북으로 갈라져 갈 수 없는 땅이 된 이북 실향민도 아닌데 말이다. 필자가 유년 시절 자란 곳은 지금의 고양시 정발산 아래 밤가시 마을, 양지 마을 위치다. 그때는 그곳을 ‘닥밭’이라고 불렀다. 한자로는 ‘저동(楮洞)’, 한양으로 진상하는 닥종이를 생산하던 닥나무 밭이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우리집 안방의 서쪽 창가에도 작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몇 해가 흘러도,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 나무는 참나무나 밤나무처럼 아름드리나무가 되지 않았다. 밥투정을 많이 하는 아이처럼 마른 모습이었는데, 아무리 성장을 해도 늘 ‘작은 나무’였던 서쪽 창가의 닥나무는 필자의 시「작은 나무」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전통 한지의 원재료라는 그 닥나무를 생각하면, 먹을 것이 없어도 배고프다 하지 않고, 비가 와도 호들갑 떨지 않는 내향형의 선비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1970년대에 태어나서 경제개발 시기에 유년 시절을 보내고, 신도시 개발과 뉴타운 붐이 일던 시절에 청춘을 보낸 이들은 어쩌면 대부분 필자와 같을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고양시 일산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나고 자란 고향에 살면서도, 고향을 잃어버린 심정으로 산다. 거기 있지만 거기 없는 상태. 모두가 가난하게 살아서 가난이 부끄럽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던 어린 시절을 지나서. ‘고향을 잃은 것도, 잊은 것도 아닌 상태’가 되어버린 채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디에 살든 디아스포라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