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대란 이름이 나의 가슴속에 각인 된 것은 1975년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방송대 소개 말씀을 들은 뒤였다. 미래의 꿈이 교사였지만, 산골 마을 소작농이었던 부모님의 가정형편 때문에 무작정 도시로 뛰쳐나가 신문 배달을 하면서 고등학교 진학에 대한 꿈을 1년 뒤 공업고등학교에서 야학을 통해 이룰 수 있었다.
주경야독의 힘든 학교생활이었지만 공업고등학교 졸업을 할 시점에는 기능사 자격증도 2개(전기용접 기능사 2급과 선반가공 기능사 2급)를 따고, 현대중공업 취업시험에도 합격해 현대중공업의 기능공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늘 가슴속에 품고 있던 대학에 대한 동경과 대학을 졸업하면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회사 생활을 하는 내내 틈틈이 공부해 1980년 서울대학교부설 한국방송통신대학 농학과에 합격했다. 방송대와의 첫 인연이다.
방송대는 ‘내 인생을 바꾼 대학’이다. 서울대학교부설 2년제에서 독립된 5년제 학사과정으로의 학제 개편은 내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특히, 초등교육과 학생 모집에서 지금까지는 교육대학(2년제)을 졸업하지 못한 교사들의 재교육을 위한 교육청 추천제 학생 모집에서 2학년 편입생의 경우는 교사가 아닌 일반학생들의 편입이 가능하며, 또한 졸업하면 초등교사 자격증(준교사)이 주어진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어려울 거라는 만류가 있었지만, 당당하게 초등교육과 2학년으로 편입학할 수 있었다. “꿈을 꾸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정말 맞는 말인 것 같다. 5년제 학사과정 2학년 편입학으로 초등교육과를 4년 만에 정상적으로 졸업하고, 곧바로 동국대 교육대학원(국어교육전공)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런데 방송대는 나에게 또 한 번의 행운을 주었다. 경기지역학습관(현 경기지역대학)에서 대학원에 다니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중 기성회 직원으로 근무할 기회를 얻었다. 덕분에 대학원 석사과정을 경제적 어려움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중등학교 국어 2급 정교사 자격증도 받았다.
그리고 졸업 후 몇 달 뒤 경상남도에서 처음으로 초등교사를 뽑는 임용고사가 있었다. 운이 좋았는지 남자 1위로 선발돼 이듬해 바로 마산(진동초등학교)에서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교사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 뒤 중등학교 전직시험을 통해 공립 중등학교로 전직하고, 중등학교에 있으면서 2002년 창원대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해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단생활을 하면서 순수 방송대 출신 교사들의 모임(방송대 사우회)을 만들어 친목 도모와 정보 공유의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아내 역시도 방송대 행정학과(1987)와 유아교육과(2006)를 졸업했는데, 하계 계절수업을 받으러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됐다.
이후 여러 학과를 졸업하는 한편,〈경남신문〉신춘문예(1994)와 아동문예(1996)에 동화가 당선돼 한국아동문학회 등에서 왕성한 문단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한국동심문학회장 및 동심문화예술연구소장을 맡고 있고, 문학잡지〈동심문화예술〉〈경남아동문학〉〈창원아동문학〉및 계간〈동심문학〉등을 발행하고 있다.
경남총동문회장으로서 올해의 계획은 편·입학생 감소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대학을 살리기 위한 방안으로 동문 재입학 운동을 추진해 모교 사랑정신과 평생학습자로서 100세 시대의 새로운 꿈을 우리 대학을 통해 펼치게 함으로써 방송대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취지에서 ‘동문 재입학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 하는 것이 제1공약이며 계획이다.
‘동문 재입학 운동’의 실천 방안으로 우리 대학 4개 단과대학과 1개 학과 이상(4개 학과)을 졸업했거나 혹은 2025년에 한시적으로 3개 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4번째 학과에서 학업을 하는 학우에게는 경남총동문회가 ‘자랑스런 방송대인’을 분기별로 선정해 상패를 수여한다는 공약을 실천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