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강성남의 그노시스

메모는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동결 건조해 보존한다. 요 며칠간 팔구백 페이지 책 두세 권을 읽으면서 밑줄치고 떠오른 생각을 메모한 걸 여러 시간에 걸쳐 나의 독서 사전에 업데이트하느라 고생했다. 책을 읽으면서 줄을 치고 생각을 여백에 적어두곤 그 책을 서가에 꽂아두면 훗날 망각의 힘은 책을 읽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게 한다.


코로나가 시작돼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까지 한 2년을 바깥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나는 20여 년 동안 손으로 쓴 독서 메모 노트를 검색이 가능하도록 디지털 편집본으로 만들었다. 최근 몇 년의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이다. 이후로는 책을 읽고 나서 그 책 내용의 요점을 디지털 사전에 업로드한다. 손으로 쓴 독서 노트가 수십 권이라도 검색할 수 없으니 그때그때 필요한 내용을 찾아서 참고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이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키보드보다 손으로 글을 쓰는 걸 권한다. 한글 키보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만 입력 방향이 정해져 있어 의식의 흐름을 자유롭게 따라잡으며 두서없이 적기에는 ‘손이 낫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중에 검색을 생각하면 손 메모보다는 디지털 메모가 유용하다는 게 나의 경험적 판단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 ~1998)은 책을 읽으면 반드시 ‘자신의 언어로 메모’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언어로 써놓지 않은 지식은 곧 증발할 감각일 뿐이니까. 생각을 연결해 놓는 메모 상자(Zettelkasten), 즉 제텔카스텐이 두 번째 뇌가 된다. 메모 상자는 기억보다는 생각 자체에 집중하게 해준다. 메모 상자는 루만을 학자의 길로 인도했다. 메모의 도움을 받아 1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교수가 되기 위한 모든 자격을 획득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빌레펠트대학교 사회학 교수로 임용돼 평생 그 자리를 지켰다.

 

베토벤의 창조적 활동이나
루만처럼 스마트한 독서와 글쓰기에는

생각과 아이디어를
동결 건조한 데 그 비법이 있다.
학습에도 그대로 적용될 만한 비법이다.

 

 

루만이 남긴 9만여 장의 메모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오늘날 하이퍼링크나 해시태그로 불리는 기법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메모가 촘촘하게 연결돼 있었다. 그런 연결 관계를 꾸준히 만들어 놓은 것이 폭발적인 글쓰기의 비법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제 하이퍼링크든, 해시태그든, 백링크든, 얼마든지 손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스마트 노트 앱들을 손에 쥔 우리가 루만과 같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루만은 ‘그 누구도 글을 쓰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라고 단언했다. 그가 남긴 메모 상자를 들여다보면 학습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행위들, 즉 책에 열심히 밑줄을 치고 그 내용을 베껴 쓰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단견적인 방법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대신에 자신이 읽은 내용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해 메모를 남기는 것, 그리고 그 메모들을 연결해 놓는 것, 이 단순한 원리만으로도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학습 성과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제는 루만의 방식을 아주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앱이 나왔다. 옵시디언, 롬리서치, Zettlr이나 ZKN3 등이 있다. 옵시디언은 2020년 캐나다에서 처음 출시했다. 용암같이 혼돈에 가까운 생각을 예리한 흑요석(obsidian)같이 바꾸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게임 마인크래프트에서는 흑요석이 가장 단단한 돌로 나온다. 2024년에는 ‘옵시디언 웹 클리퍼’를 출시했다. 옵시디언이란 이름은 에티오피아에서 이 돌을 찾은 로마인의 이름(Obsius)에서 유래한 것이다. 라틴어로는 Lapis Obsidianus라고 하는데, lapis는 돌, 경계석 또는 이정표석을 의미한다. 이정표석은 로마를 기점으로 약 1.5km마다 세워졌다고 한다.


베토벤이 작곡할 때는 당시 스케치북이 필수 도구였다. 몇 시간이고 제대로 된 형식을 찾을 때까지 피아노 앞에서 반복해서 연주했다. 마침내 찾아낸 것을 탁자 위 노트에 기록했다. 이런 메모는 충동적인 즉흥연주와 최종 작곡 사이에 놓인 의식이 형성되는 중요한 과정을 동결 보존했다. 펜으로 사고를 종이에 옮기는 데 필요한 시간을 통해 그는 생각을 좀 더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다음 단계에서는 그 생각을 고치거나 아니면 아예 포기해 버릴 수도 있다. 손이 머리를 못 따라갈 수도 있다. 그래서 베토벤은 처음에 보통 음자리표, 조표, 마디 없이 사고의 핵심만 메모에 남겼다. 임시기호도 적지 않았다. 이 단계에서는 장식이나 강세 같은 세밀한 부분과 음악 재료인 기본 요소도 기록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 베토벤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자신만의 단어들을 대략 적어 놓았다.


베토벤의 스케치북에는 모든 가능성이 들어 있는 셈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생각의 데이터 뱅크다. 베토벤은 산책할 때 떠오른 생각을 조그만 노트에 연필로 기록하고 집에 와서 스케치북에 옮겨 적으며 생각을 키웠다. 이런 작업은 베토벤의 창작이 새롭고 지성이 강조된 단계로 이행됐음을 의미한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보면, 성공은 저항을 극복하는 능력이나 강인한 의지력의 결과라기보다는 애초에 저항력이 생기지 않게 예방하는 스마트한 작업 환경의 결과라는 점이 입증됐다. 베토벤의 창조적 활동이나 루만처럼 스마트한 독서와 글쓰기에는 생각과 아이디어를 동결 건조한 데 그 비법이 있다. 학습에도 그대로 적용될 만한 비법이다.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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