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죄료장수, 무(無)의 갑골문자, 유기적 에너지의 무늬들, 국제지(國制知)’ 등은 가장 최근 나의 메모장에 기록한 개념들이다. 매죄료장수는 맷돌의 닳은 이를 정으로 쪼아 날카롭게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맷돌을 오래 사용하면 무뎌져 곡식이 잘 갈리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게 이렇다. 심지어 말도 그렇다.
사물의 정곡을 더 잘 포착하는 개념어가 등장하면 기존의 무딘 개념어는 사라진다. 한자어 ‘없을 무(無)’의 갑골문자는 이해 불가의 그림이다. 사람이 양손에 뭔가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표의문자는 단순히 추상적인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표현하고자 하는 낱말의 뜻을 시각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물리(物理)를 ‘우리(WuLi)’라고 부르는데, 이게 ‘유기적 에너지의 무늬들(Pattern of Organic Energy)’이라는 뜻이다. 현대물리학에서 질량이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질량이며,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양자가 에너지 다발을 의미하는 점을 고려하면 대만에서 물리 개념의 정의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국제지(國制知)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근대화 과정에서 문명국가로의 도약을 위한 제도적 틀을 갖추기 위한 지식을 강조하면서 한 말이다. 그의 이름, 히로부미(博文)는『논어』의 옹야편에 나오는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그것을 단속한다면 또한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차용해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가 지어줬다.
독자들은 이런 메모를 보면서 필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메모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것 중에 어떤 것을 낚아챘는지, 낚아챈 생각 조각을 어떻게 간직했는지, 그렇게 채운 아이디어 창고에서 무얼 만들어내고 싶은지가 메모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손으로 직접 메모를 작성하는 행위는
생각을 정리하고 창의력을 높이는 길이다.
메모 노트는 ‘감정의 축전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감동을 발산한다.
공부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무얼 원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예민하게 느끼는 게 뭔지가 고스란히 메모에 녹아든다. 머릿속에서만 부유하던, 설명하기 어려운 아이디어들이 메모라는 형태로 건조 동결되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유용한 재료가 되기도 한다.
책의 역사를 서술한 책은 많다. 메모의 역사를 소개한 책은 드물다. 이 칼럼을 쓰기 직전에 완독한 책,『쓰는 인간: 종이에 기록한 사유와 창조의 역사』(롤런드 앨런 지음·손성화 옮김, 상상스퀘어, 2025)는 메모의 역사와 쓸모를 비롯해 메모를 통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소개한다. 이 책에 나오는 극히 일부 내용을 간추린다.
#‘최초의 공책’은 기원전 1305년께 튀르키예 남부 울루부룬 해안에 가라앉은 난파선에서 나온 나무와 상아 재질의 접이형 서판이다. 이 서판이 고대 로마로 건너가 석 장짜리 서판으로 보편화됐다. 폼페이에서 발견한 프레스코화 속 여성이 푸길라레(pugillres), 즉 ‘휴대용 서판’을 들고 있다.
# 14세기 르네상스 문인인 페트라르카는 낱장에 적은 메모를 초고로 삼고, 고급 양피지에 쓰인 완성본 책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만3천여 쪽의 노트를 남겼다. 대략 50권에 달하는 학술서 분량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메모하라. 대상의 형태, 자세나 위치는 너무나도 무한하기에 기억만으로 간직할 수 없는 탓이다. 그러니 이 스케치를 길잡이이자 스승으로 삼아 간직하라.” 메모는 자기 생각을 보다 제대로 다루기 위해 종이에 적어서 ‘외재화’하는 것임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알아차렸다.
# 아이작 뉴턴은 교구 목사였던 의붓아버지가 남긴 설교용 비망록 노트의 여백에 수학 기호들과 도해, 수식 등을 메모했다. 이것은 그의 저서『프린키피아』의 토대다.
# 찰스 다윈은 왕립해군함 비글호를 타고 남아메리카 대륙과 갈라파고스 제도,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를 답사하며 본 모든 것을 15권의 현장 수첩에 남겼다. 폴 발레리는 2만8천 쪽에 이르는 노트를 두고 자신의 ‘진정한 전작(全作)’이라 부를 정도로 애정을 보였으며,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66권 중 58권은 그의 메모 노트(73권)에서 나온 것이다.
# 치발도네(zibaldone)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방언이다. 여러 글을 흩뿌려 모아놓은 노트를 의미한다. 노트라는 그릇에 담은 걸 잡문이라 해도 좋을 것을 ‘각종 허브 샐러드’라고 음식으로 은유하는 재치가 돋보인다. 좋아하는 조각 글이나 유용한 내용을 개인 노트에 그대로 옮겨 적으면 된다. 텍스트를 즐기려면 이처럼 베껴(기왕이면 자기 언어로) 쓰는 노고를 떠맡기만 하면 된다.
자신이 모은 ‘창작 소재’를 필요에 따라 조합하고, 저마다 선택한 것을 주제에 따라 ‘공용공간(common place)’에 배열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영어로 ‘commonplace book’은 비망록이란 뜻이다. 잘 정리된 비망록은 일종의 ‘외재화된 기억’으로 작동한다.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존 밀턴, 존 로크 등이 모두 비망록 애호가였다.
손 글씨를 쓸 일이 거의 없는 디지털 시대라지만, 손으로 직접 메모를 작성하는 행위는 생각을 정리하고 창의력을 높이는 길이다. 메모 노트는 ‘감정의 축전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감동을 발산한다. 공부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