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암흑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음을 뜻하는 광복절(光復節)마다 개최돼온 기념식, 의무교육에 포함된 역사 수업, 항일 소재의 영상물 등을 통해 한반도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은 공식화·내면화돼 있다. 이러한 공동의 역사 인식에 도전하는 세력이 간헐적으로 고개를 들지만 결국 다수의 비판에 의해 중화되면서 결과적으로는 국민적 공감대가 불안정하게나마 유지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공동의(혹은 국민 대다수의) 역사 인식은 앞으로도 항구적으로 유지돼야 할까? 그에 대한 도전에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가? 국적이 다른 재외동포가 주류 한국인과 전혀 다른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면 그들을 타자화하고 한민족의 범주에서 배제해야 마땅한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과 방송대출판문화원 교양출판팀이 협력해 출간한 『해방의 기억』은 공식적 역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촉구하는 화제의 책이다. 기존의 동어반복적인 8.15의 기억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사고와 인식의 역사적 범위를 한반도 내지 대한민국에 국한하지 않고 확장한다. 거시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제국주의적 식민지배와 제3세계의 저항을 다루고, 미시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과 더불어 만주, 일본, 북한의 코리언‘들’을 논의의 중심으로 초대하고 있다. 이번 커버스토리에서는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면서 광복 80주년의 의미를 짚었다.
이현구 기자 zuibm@knou.ac.kr

학습 의욕 고취하는 서장의 문제의식
서장(‘들어가며’)에서 집필진의 시대정신과 출간 의도를 선언적이고 도전적인 어조로 빈틈없이 설명한 문장들은 한반도 근현대사 재교육 자료에 가까운 책을 펼치자마자 닥쳐올 수 있는 조건반사적 졸음을 이겨내고 학습 의욕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법하다.
서장을 작성한 박영균 건국대 교수는 역사적 지식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경향을 경계한다. 상징 자본의 독점체인 국가가 해석하고 의미화한 역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면, 정권에 따라 역사 서술이 변질될 경우 대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반지성주의와 역사의 도구화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역사란 고정된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 계속해서 분열하면서 서로 충돌하는 기억‘들’ 또는 서사‘들’이고, 이미 지나간 특정 사건에 관한 기억이자 이야기지만 결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무수한 목소리들의 분출이다. 이 대목에서는 역사학자 도미니크 라카프라가 인용된다. “역사란 과거의 텍스트와 현재 역사가의 끊임없는 다성(多聲)적 대화”라는 것이다.
과거가 지금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현재와
교차하며 바라보지 않으면
한 해 한 해 숫자만 더해질 뿐인
‘○○주년’을 ‘기념’하여
행하는 의식은 그저 형식적인
수사와 겉치레, 국가화된 기억의
정치에 불과할 뿐이다.
8.15에 대한 열린 물음과 다성적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서장에 제시된 전제는 다음과 같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신구 제국주의 세력 간의 주도권 쟁탈전이었으며, 전후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 중에는 추축국인 독일·일본·이탈리아의 식민지는 물론이고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시아·중동·아프리카 국가들도 많았다. 또 전후 냉전체제의 양 축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제3세계 국가들의 재건을 원조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 상호 의존을 통해 국제적 패권을 쟁취하고 신생 독립국의 진정한 탈식민화를 가로막았다. 한반도의 남북 분단이 그 결과 중 하나였다.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유례없이 급속한 발전을 이뤄낸 대한민국 역시 완전한 탈식민화에 이르기 위해선 지난 역사를 끊임없이 ‘다시 기억’해야 하며, 이 과정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만주, 북한, 일본 등지에 정착한 또 다른 코리언‘들’의 동참이 필요하다.
1~3부, 한·중·일 공식 기억의 교차 조명
총 9편의 에세이로 구성된 1~3부는 다수의 기록물과 문학 작품을 소개하면서 8.15에 관한 국가별·집단별 기억의 차이를 조명했는데, 특히 1부 ‘동아시아의 탈식민과 냉전, 공식 기억의 교차’에서는 각국의 역사 교과서를 통해 한·중·일의 공식 기억을 교차할 뿐 아니라 거기에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과 재중조선족의 역사 경험과 기억까지 교차하고자 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에 포츠담선언을 수락하며 항복했으나, 전후 여론 형성 과정에서 이를 ‘패전 선언’이 아닌 ‘세계 평화를 위한 종전 선언’으로 재의미화했다. 이후의 역사 서술에서도 일본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은폐하고 원폭 피해를 강조하면서 자국의 이미지에 아시아·태평양전쟁의 피해자라는 위장을 덧씌웠고, 만주를 탈환·회복한 중국은 항일 전쟁의 지위를 세계 평화와 파시즘 축출을 위한 결정적 승리로 격상시킨다.

이러한 역사 왜곡에 따른 혐오와 반목을 극복하려는 취지로 한·중·일의 연구자와 교사가 공동 집필한 『미래를 여는 역사: 한중일이 함께 만든 동아시아 3국의 근현대사』(한겨레출판, 2005)처럼 각국의 공식 기억을 교차하고 간극을 좁히기 위한 시도도 있었다.
동아시아 각지로 이주한 조선인 디아스포라들은 거주 지역에 따라 8.15와 관련한 서로 다른 기억을 갖게 된다. 2등 시민으로 취급되던 만주의 조선인은 해방 소식에 기뻐하지만 소련군의 약탈과 중국인과의 충돌에 직면하며 해방 전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고, 사할린의 조선인은 해방 이후에도 정치적 이유로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다. 재일조선인의 상황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모국과 일본 모두 극심한 이념 대립이 진행 중이었고, ‘한국적’과 ‘조선적’ 중 무엇을 택할지 판단하기 어려웠으며, 일본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으면서 일본인이 되기 위해 노력한 이들에겐 해방이 환희보다 공포를 안겨주는 사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2부에는 월북을 선택한 소설가 이태준, 동북 지역에서 활동한 소설가 최국철과 시인 설인의 작품 일부가 인용됐는데, 해방 이후의 환희와 공포,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대립과 혼돈을 극명하게 묘사한 내용들이다. 재일조선인 문학자로서 소개된 김사량, 김석범, 이회성, 이양지, 유미리, 서경식 등은 활동 시기가 상이하지만 모두 언어적·공간적 정체성 문제로 번민했다. 서경식은 어느 시상식에서 “나는 모든 것을 일본어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일본어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벽’에 갇힌 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는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좀 더 넓은 곳으로 나가고 싶었고 이전에 갈기갈기 찢어진 동포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 번민의 나날을 보내왔습니다”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3부에서는 8.15를 맞이했던 전남 보성군 회천면의 당시 상황, 북한 사회, 재일조선인 사회 등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특히 전남 보성군 회천면의 정해룡, 정해진 형제의 활약이 인상적이다. 해방 전부터 전답을 매각해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이들은 해방 후 협상을 통해 일본군과 민중의 유혈 충돌을 방지했으며, 하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남은 재산을 분배해 살길을 마련해주었다. 토지개혁의 요구가 일어나기 전에 단행된 선구적인 조치라고 평가된다.

4부, ‘다성적 대화’의 실험
세 차례의 대담 내용이 수록된 4부는 집필진의 기획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 1~3부에 수록된 ‘무수한 목소리들의 분출’을 소재 삼아 ‘다성적 대화’를 실험하기 위한 구성이다. 대담 참여자는 한국인 4명, 재중조선족 2명, 재일조선인 2명, 탈북민 1명이며 1~3부의 에세이를 읽은 다음 대담에 임했다. 모두 20~30대로 광복 시기와는 거리가 먼 젊은이들인데,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8.15가 박제된 이미지로 기념화되기보다는 새로운 의미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들을 초대했다는 것이 집필진의 전언이다.
기자 역시 1~3부를 읽고 나서 4부의 대담 내용을 접해서인지, 대담 자리에 직접 참석한 것처럼 생생하게 읽힌다. 정중하고 절제된 대화가 오가는 중에 간혹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나올 때는 발언권을 요청하고 싶었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혐오감을 자각하며 마음속으로 사과를 건네기도 했다. 대담 참여자들이 에세이에서 인상 깊었던 대목을 밝힐 때면 ‘나도 그랬는데’ 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역사적·국제적 현안에 대해 희망적이고 평화지향적인 가치관을 드러낼 때는 세대와 국적을 초월한 연대의식과 민족적 동질감으로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결론적으로, 박제된 기억과 반지성주의에 저항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독자 여러분도 이 책에 등장하는 코리언‘들’에 공명하고, ‘다성적 대화’ 실험이 내면으로 확장됨을 경험하게 되리라 기대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