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제시된 규칙을 숙지하고 반복된 시도를 통해
숙련도를 높여야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학습이며,
시간과 노력을 들여 특정한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노동이다.”
- 제인 맥고니걸(Jane McGonigal)
방송대 학과의 실험·실습을 스마트폰이나 PC 화면의 가상 환경에서 해볼 수 있다면 비용과 시간 면에서 더없이 효율적일 것이다. 농학과 학우가 부작용 걱정 없이 사료나 비료를 원하는 대로 투여하고 가축과 작물의 생장을 단시간 내에 관찰할 수 있다면? 보건환경안전학과 수업에서 배운 화학 실험을 안전사고의 부담 없이 마음껏 해볼 수 있다면?
실험·실습이 중요한 학과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첨단 기술을 통한 교육 혁신을 뜻하는 ‘에듀테크(EduTech)’의 이상이 실현된다면, 어문계열 학우들이 동서양의 대문호를 마주한 채 원어로 대화하고, 법학과 학우들이 교재에서만 접했던 역사적 판결을 참관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첨단 기술이 약속하는 미래 교육의 청사진은 얼마나 실현됐을까? 위클리 265호에서 간략하게 보도했던 ‘방송대 오픈브이랩 공청회 및 에듀테크 코리아 페어’ 관련 기사를 참고해 되짚어본다.
이현구 기자 zuibm@knou.ac.kr
교육과 게임
지난 9월 18~20일 개최된 ‘2025 에듀테크 코리아 페어’와 그 부대행사로 열린 방송대 오픈브이랩(OpenVlap)구축사업단(단장 이병래 부총장)의 ‘가상실험·실습 학습콘텐츠 제작 가이드(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이하 공청회) 취재를 하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이날 출품된 교육 관련 콘텐츠들과 게임의 공통점이었다.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 이르는 교육과정 중 특히 실험·실습과 관련된 출품작들에 적용된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 확장현실(extended reality, XR) 등의 기술은 게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들이며, 대다수의 학습콘텐츠가 3차원 그래픽 구현을 위해 언리얼과 유니티 같은 게임 엔진을 채택하고 있었다.
행사장을 돌아보는 동안 “게임은 제시된 규칙(원리)을 숙지하고 반복된 시도를 통해 숙련도를 높여야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학습이며, 시간과 노력을 들여 특정한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노동”이라는 미래학자 제인 맥고니걸(Jane McGonigal)의 주장이 떠올랐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게임과 학습(및 노동)의 근본적 차이점은 내적 동기부여 유무이고, 참여자 스스로가 원해서 하는 것은 게임, 외적인 이유로 해야만 하는 것은 학습(및 노동)이 된다.
메타버스의 축소판, 실감형 학습콘텐츠
이날 소개된 가상실험·실습 콘텐츠들은 VR 및 그 파생 기술을 바탕으로 인간의 오감을 자극해 실제에 가까운 학습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실감형 학습콘텐츠’라고 불리기도 한다.
여러 기관과 기업의 실감형 학습콘텐츠들에는 메타버스(metaverse)의 개념이 제한적으로나마 구현돼 있었으며, 특히 EBS 부스는 명시적으로 ‘교육용 메타버스’를 표방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개념의 메타버스처럼 영속성과 무제한성을 지닌 가상 세계는 아니지만 적어도 과학 실험, 체육 수업, 토론 수업, 직업 체험 등의 주제별 학습에 필요한 물리 법칙이 구현돼 있었고 이용자는 일종의 아바타를 통해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도록 설정돼 있었다.

방송대 오픈브이랩구축사업단의 비전
공청회의 첫 번째 발표는 가상실험·실습 학습콘텐츠의 공유를 통한 중복 투자 방지와 효율성 제고 등 공유플랫폼 구축 사업의 취지와 현황에 대한 김연신 방송대 교육정보화본부 팀장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발표를 맡은 조용상 한림대 겸임교수는 가상실험·실습 학습콘텐츠 제작과 관련된 세부적 권고안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플랫폼에 구애받지 않는 원활한 구동을 위한 그래픽 정밀도 조정, 카메라 시점과 시야각의 기준점, 장애인을 위한 접근성 강화 방안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학습콘텐츠의 활용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또 개인 정보 보안을 위한 유의점, 맞춤형 학습과 저작권 문제 해결을 위한 메타 데이터 수집 체계, 개별 콘텐츠의 하위 구성요소도 재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 구조 등은 공유플랫폼의 치밀한 설계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요소였다.
실감형 학습콘텐츠 체험
대학본부 국제회의장 1층의 ‘지역사회 공유형 가상실험·실습 체험관’은 본지에서 여러 차례 소개됐지만, 기자는 현재 구현돼 있는 학습콘텐츠를 직접 경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체험관을 다시 찾았다. 스탠드형 PC와 HMD(head mounted display, 머리에 착용하는 디스플레이 장치)가 연결된 체험 장비가 총 4대 설치돼 있고 안전사고, 가상실험, 직무훈련 등에 관한 총 11개 콘텐츠가 준비돼 있었다. 아직 방송대 학과 관련 콘텐츠가 없어 아쉬움이 남았지만, 안내에 따라 HMD 기기를 착용한 후 △지진 발생 시 대피 실습 △실험실 폐시약 폐기 △인체 각부의 골격과 근육 관찰 등 세 가지 콘텐츠를 골라 체험했다.
체험관 콘텐츠들은 1인칭 시점의 3차원 그래픽 게임과 비슷했는데, 특히 상호작용의 범위, 이동 및 시선 전환, 조작 장치 등의 유사점이 두드러졌고, 에듀테크 코리아 페어 출품작들처럼 게임 엔진을 기반으로 제작됐음을 확인했다. 항공기 운항, 자동차 운전, 음식 조리, 의학적 수술 등의 작업을 가상 환경에서 경험하는 시뮬레이션 게임(simulation game)과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3차원 게임에 익숙한 기자에게도 HMD 기기는 처음이었는데, 그래픽이 아주 정밀하진 않았는데도 디스플레이가 눈앞에 밀착돼서인지 몰입도는 대단히 높았다. 지진 발생 시 대피 실습을 하며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갈 때는 긴장감이 느껴졌고, 3차원으로 구현된 인체 각부의 골격과 근육을 관찰하며 신선한 충격을 받기도 했다. HMD 기기 사용 시 많은 사람이 멀미와 유사한 증상을 호소하는데, 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통상적인 체험 시간은 5분 정도지만 취재를 위해 좀더 긴 시간 동안 여러 콘텐츠를 경험했던 탓에 증상이 심해지기도 했다.
개선을 위한 제언
멀미 증상은 기술 발전과 함께 해결될 지엽적인 문제이며, 방송대 학과 수업 콘텐츠도 플랫폼 구축 및 시범 운영 단계를 넘어서면 지속적인 콘텐츠 개발과 공유를 통해 보완될 것으로 보인다. 또 오픈브이랩구축사업단의 공유플랫폼 구상과 제작 가이드가 복잡다기한 문제들을 세심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점도 희망적이다.
다만 앞에서 소개한 제인 맥고니걸의 주장을 상기할 때, 그리고 대다수의 학습콘텐츠들이 구조적·기술적으로 게임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게임 특유의 내적 동기부여 요소를 가미할 경우 학습 촉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현재의 콘텐츠들은 학습 주제 선택 방식부터 기존의 온라인 학습을 답습하고 있고, 다소 기계적인 음성 안내로 지루함을 유발하는 면이 있다. 각각의 콘텐츠에 걸맞은 배경음악을 추가하고, 월드맵을 탐험하면서 학습 주제를 선택하도록 설정하면 어떨까? 게임의 경쟁 요소와 SNS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도입해 학습자들이 치열한 순위 다툼을 벌이는 동시에 서로를 응원하도록 한다면?
또 제작 가이드에선 기기의 성능에 상관없이 일정 수준의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WebXR 표준을 따르고 있고 이용자의 개별 기기에서 렌더링이 이뤄진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렇게 할 경우 그래픽 정밀도의 하향 평준화가 불가피하다. 그래픽 렌더링은 데이터 센터에서 수행하고 이용자의 기기에선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방식으로 실행 영상이 재생되는 클라우드 렌더링(cloud rendering)을 도입하면 그래픽 정밀도와 이용자 접근성을 모두 극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이상의 제언이 탁상공론에 불과하거나 개발 주체들이 이미 고려 중인 사항일 수도 있다. 다만 방송대가 구상한 학습콘텐츠 공유플랫폼이 효율성 극대화와 교육기관 간 시너지 효과 산출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되길, 그리고 여러 면에서 게임과 유사한 ‘실감형 학습콘텐츠’가 게임처럼 끊임없이 진화함으로써 학습자들의 호응과 자발적인 몰입을 이끌어내길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