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자의적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시민과 역사에 대한 무한한 책임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오늘도 뉴스의 첫머리는 ‘검찰 수사’ 기사로 시작된다. 하지만 법의 이름으로 휘둘러지는 칼이 과연 정의의 검인지, 아니면 정치의 칼날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의 심장부에서 법은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와 싸우는 것일까.
검찰은 원래 범죄를 법 앞에 세우기 위한 공소권을 가진 기관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렇듯 신성한 권한을 정치적 기소와 여론전에 결합시켜, ‘정의의 이름으로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도구’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맞물리면서, 검찰은 공익의 대표자라는 자리에서 벗어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권력 집단으로 변해버렸다는 의심을 대다수 국민에게 받고 있다. 법의 이름을 걸고 있지만, 그 칼끝은 공평하지 않았고 종종 자의적이고 편향적으로 나쁜 권력을 보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법정의 안팎에서도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재판은 헌법이 보장한 정의와 인권 실현의 마지막 보루다. 하지만 판사들이 재판권의 독립을 명분으로 스스로를 성역화하고 그 성역 안에서 폐쇄와 독단의 벽을 쌓아 올리면서 시민의 상식과 신뢰에서 멀어지게 되면 ‘사법부의 독립’은 곧 ‘무책임의 성역’이 되고 만다. 사법부의 독립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 가운데 하나이지만, 삼권분립의 ‘견제와 균형’의 작동 원리에 따라 시민의 신뢰라는 토대를 튼튼하게 쌓지 못하면 바로 설 수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지점을 생각할 때, 메이지 일본의 헌법은 중요한 반면교사가 된다. 1889년 2월에 제정된「대일본제국헌법」제11조는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은 군부를 정치의 통제 밖에 두었다. 그 결과 군은 ‘천황의 군대’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감시를 벗어나 폭주하기 시작했고, ‘군부의 독립’은 일본을 파국으로 몰고 간 제도적 근거가 됐다. 국가 기관의 독립이 ‘견제와 균형’을 거부할 때, 시스템 전체가 어떻게 무서운 광기와 무책임의 체계로 변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지금 한국의 사법제도 역시 비슷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검찰과 법원은 대한민국의 복잡다양한 관계망에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일종의 수원지(水源池) 역할을 하는 곳이다. 자신의 권력에 대한 자정능력을 견지하게끔 적절하게 물꼬를 열어줘야 한다.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 인사 절차의 투명화, 재판 공개와 판결 검증은 제도의 신뢰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보인다. 제도가 인간의 선한 양심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양심이 작동할 수 있는 구조와 환경을 만들 수는 있다. 법은 자의적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시민과 역사에 대한 무한한 책임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검찰 공소권의 남용은 권력의 칼날이 법의 이름으로 휘둘려지는 현상이다. 여기에 재판권의 오남용이 이어지면 건강한 공동체와 민주주의는 무너지게 된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제도의 이름으로 내부에서 시민의 무관심 속에서 자란다. 법의 이름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시대를 끝내고, 법이 시민 대다수의 상식과 신뢰의 언어로 말하게 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싶은 민주주의,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