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할 즈음에 지인들이 묻는 공통적인 질문이 있다. ‘퇴직 후 고향에 내려가서 살 것인지’다. 누군가가 나에게도 퇴직하고 나서 낙향해 지내면 좋다고 권유까지 했다. 도대체 고향이란 무엇이길래, 현직일 때는 말투로 서로의 고향을 유추만 하다가 꼭 퇴직할 땐 고향을 생활에 품으라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주나라에서 송나라까지의 한시와 문장을 담은『고문진보(古文眞寶)』에 나오는 작자 미상의「고시」라는 시에는 “북쪽 이민족의 말은 북풍에 귀를 기울이고, 남쪽 월나라의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튼다”라는 구절이 있다. 회귀성 동물은 유전자에 고향을 각인해 있는 것일까? 네 살짜리 푸른바다거북 한 마리가 2020년 9월 제주 중문 해수욕장에서 방류됐다. 90일 만에 3,847를 헤엄쳐 고향인 베트남 동쪽 해역에 정착했다. 이 거북은 2017년 인공증식을 통해 태어났다. 베트남 인근에서 포획된 어미가 국내에서 수컷과 짝짓기해서다. 멸종 위기종인 푸른바다거북의 주요 산란지는 베트남 등 동남아 인근이다. 이 거북이는 아예 있어 본 적이 없는 엄마의 고향을 찾아 1만 리가량을 헤엄쳐 돌아갔다.
이처럼 동물도 자기 삶을 촉발한 곳인 고향을 쉬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고향을 ‘삶의 자양분을 제공한 어머니의 품’으로 여겨서일까?
독일어에 ‘발하이마트(Wahlheimat)’라는 단어가 있다. ‘내가 선택한 고향(제2의 고향)’이란 뜻이다. 지금, 우리는 태어난 나라를 선택할 수 없지만 살아갈 나라는 선택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실 고향을 택할 수 있다는 건 안정적인 나의 고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고향은 본래 그 안에 살고 있는 자들을 위한 단어가 아니다. 낯선 곳에서 분투하는 자들, 스며들지 못하는 자들이 더 진하게 맛보는 단어다. 한마디로 고향을 느끼는 자들은 그곳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발하이마트’라는 단어는 태생적으로 어느 정도의 아픔과 그리움을 담고 있다.
프랑스 스콜라학파의 철학자, 위그 드 생 빅토르는「공부」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다. 모든 땅을 자기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한 자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다. 미숙한 영혼의 소유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세계 속 특정한 하나의 장소에 고정한다. 강인한 자는 그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고자 한다. 그러나 완벽한 자는 그 자신의 장소를 없애버린다.”

사과 속에 있는 씨앗은 누구나 셀 수 있지만,
씨앗 속의 사과는 아무도 셀 수 없다.
오늘도 세계의 많은 인간 씨앗이 타향의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애쓰고 있다.
이들이 어떤 열매를 맺고 숲을 이룰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에게도 자기 삶이 촉발된 곳이 있다. 즉 미숙한 상태에서 삶의 여정을 시작한 곳이다. 그래서 고향은 자랑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본래면목이라는 자화상이 걸려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자신에게 성공이나 영예를 안겨준 타향 숭배의 감정 때문에 고향은 세속적으로 진화해 온 욕망이 회피하고 싶은 곳이 된다.
또한 고향은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없는 곳이자 불편한 상징 자본을 떠안겨 주는 곳이기도 하다. 헤겔의 변증법 기본 법칙에는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 있다. 이 법칙은 변화 방향을 설명한다. 변화는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과거의 나를 부정해야 새로운 내가 탄생할 수 있다. 이 부정의 부정을 멈추지 않고 반복해야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간다. 고향 사람들은 이런 부정의 부정을 통해 성장한 상대방을 모른다. 부정되지 않은 옛날 어린 시절의 그를 기억할 뿐이다.
고향에서 벗어나서 타지에서 생활하는 건 낯섦(프랑스어 depaysement)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환경 변화에 따른 적응 과정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고향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은 타지에 나갔다가 성인이 되어 돌아온 이들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그것도 어릴 적 기억에 기대어서 말이다. 사람은 6개월이면 생물학적으로 변해서 과거의 내가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현재 그의 모습은 생물학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 전혀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다. 이런 정신적 성숙을 고향 사람들은 모른다. 정보 비대칭 때문에 상대방을 왜곡하거나 오해한다.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고향에서는 배척을 받으셨다.「마가복음」 6장 4절에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는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어릴 적의 출신성분이나 배경을 거론하면서 예수님을 무시했다. 그래서 예수님도 고향을 자주 찾지 않았다.
큰 사람이 모두 고향을 가지고 있지만 큰 데는 고향을 떠난 타향의 토양이다. 일론 머스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조란 맘다니는 우간다를 제1의 고향으로 뒀지만, 미국이 ‘발하이마트’인 사람들이다. 사실 지금의 미국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일군 나라다. 사과 속에 있는 씨앗은 누구나 셀 수 있지만, 씨앗 속의 사과는 아무도 셀 수 없다. 오늘도 세계의 많은 인간 씨앗이 타향의 땅에 뿌리를 내리려고 애쓰고 있다. 이들이 어떤 열매를 맺고 숲을 이룰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근 조건부 1조 달러를 보상 받기로 한 머스크와 뉴욕시장 당선자 맘다니(Zohran Kwame Mamdani, 1991~ )를 통해 고향이란 무엇인지를 새삼 사유하게 한다.
방송대 명예교수·행정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