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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마산수출자유지역 공장에 가야 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오빠들은 자연스럽게 대학에 갔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너무 부당하게 느껴졌다. 결국 단식투쟁까지 벌인 끝에 부모님은 “대학은 안 되지만, 고등학교는 보내주겠다”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얻어냈지만, 그때 마음속에 남은 것은 배움에 대한 결핍과 그리움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자주 상처받았다. ‘도대체 대학을 나왔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사람의 평가까지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이 마음에 남았다. 그 당시 고졸자로 같이 근무한 언니들과 똘똘 뭉쳐 많이도 울었다. 늘 캠퍼스에서 공부하고 토론하며 생활하는 모습을 동경했지만, 현실은 아이들 양육과 갑작스러운 아버지 병간호로 이어졌고, 직장까지 그만두게 됐다.


2~3년 동안 가정주부로 지내다 다시 취업을 시도했지만, 고졸 학력으로는 이력서를 제출할 곳조차 제한적이었다. ‘학력의 벽’이 이렇게 높다는 사실에 반감과 오기가 동시에 일어났다. 야간대학도 도전해 보고, 방송대의 다른 학과도 여러 번 지원해 보았지만 아이 양육이 늘 문제였다. 그러나 40대 중반,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결심이 섰고 결국 방송대 교육학과 입학을 선택했다. 나의 꿈인 교사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방송대에서의 배움은 나를 단단하게 했다. 그래서 스터디 팀명이 ‘4년 만에 졸업하자’로 정했다. 학부 시절 3년간 임원으로 활동하고, 스터디 팀장을 4년 맡으면서 나는 ‘가르치는 사람’의 역할이 나와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부 때 학생회 임원 역할을 한 게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씨앗이었다. 후배들에게는 학생회 임원 활동을 추천한다. 학부 때의 활동은 평생교육사의 역할과도 동일하다.


내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시작했던 작은 학습이 입소문을 타서 공부방으로 발전했고, 새로운 학부모를 만날 때마다 “저는 고졸입니다”라고 사전에 말하던 시절도 떠오른다. 그럼에도 가르치는 일은 나를 더 성장시켰다. 배움이 쌓이자, 교육자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분명해졌다.


방송대는 나 혼자만의 변화로 끝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경남 남해군 창선면 출신의 중·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인데, 남편 역시 아르바이트로 학업을 이어가며 대학을 졸업했다. 공무원으로 정년을 앞두고 있지만, 늘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을 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을 알기에 방송대를 소개했고, 남편은 내가 학부부터 대학원까지 꾸준히 공부하고 동문 활동까지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깊이 신뢰하게 됐다. 결국 남편도 방송대 진학을 결정했다. 아들도 군 제대 후 복학 대신 취업 준비 과정에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서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가족 여행 중 관심을 가지게 된 일본학과에 도전해 공부하고 있다.


돌아보면 방송대는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 배움의 길을 함께 걷게 해 준 학교였다. 정체된 가족이 아니라 고령화 시대에 걸맞은 평생 학습자로 살아가고, 가족끼리도 대화가 부족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에게 자극제가 되어주며, 신선감 있는 구성원, 새로운 변화를 즐겨하는 우리에게 방송대는 벗이자 학습공간이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방송대 대학원에 다시 입학하고 싶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고, 가족의 대화와 관계까지 풍성하게 만들어 준 삶의 배움터가 그리워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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