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한석현의 히포므네마

 

 

 

 

 

 

 

 

 

우리가 이 단어(히포므네마)에서 간직하려는 것은 단순히
정보 저장 도구의 이미지가 아니라 자기반성과 수양으로서의
사유의 수첩이라는 이미지다. 이는 또한 굴욕을 굴욕으로
느끼기 위해 요구되는 실천을 상징한다.

 

함께 생각하면 더 나은 결과물이 도출된다. 흔히 집단지성이라는 용어를 입에 올릴 때의 문면이다. 이렇게 통속화된 용례로만 보자면 ‘구두장이 셋이 모이면 제갈량보다 낫다’라는 오래된 경험적 지혜와 별다를 바 없기도 하다. 시작점은 20여 년 전 출간된 하워드 라인골드의 『똑똑한 군중』일 것이다. 저자는 정보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대중의 의견 표출 양상의 변화를 짚었다. 분산되어 있는 개개인의 다양한 의견을 집약할 때 평균을 상회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수학적 인식은, 정치 영역에서 밀실의 원탁을 대체하는 열린 광장이라는 다소 범상한 이미지로 변형된다.

 

그에 앞서 피에르 레비가『집단지성』(1994)을 말했을 때는 조금은 더 미묘한 사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파편화된 지식과 견해를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할 수 있는 기술적 조건의 성립은 사고의 메커니즘 자체를 변화시키리라. 레비의 희망 섞인 예견에서 연상되는 것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개인들보다는 네트워크로 이뤄진 거대한 인공두뇌의 이미지다. 이때 지성은 저마다 고유명을 지닌 개별체의 지성도, 익명화된 집합체의 지성도 아닌, 차라리 사물의 지능에 가깝다. 지성(intelligence)은 그 배후에 어떤 인격의 존재를 상정하지만, 같은 단어를 지능으로 옮길 때 인격의 그림자는 얼마간 희미해진다. 고로 연결과 집적의 기능 자체를 추상화한 개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면 집단지성이 아니라 집합적 지능으로 옮겨야 옳다.

 

시계를 되돌려 보자. 1960년대 후반 서구 사상계에는 상호텍스트성이란 용어가 배회하기 시작했다. 텍스트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이 신조어는 어떤 텍스트도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의 모자이크라는 인식을 표현한다. 단순화하면 하나의 텍스트는 선재하는 텍스트와 코드들의 변형과 조합으로 구성된다는 의미다. 인용부호 없는 인용, 짜임, 직조의 이미지는 이후 종종 상호텍스트와 하이퍼텍스트를 연결 짓는 담론을 낳기도 했거니와 지금에서 보면 거대언어모델(LLM)의 작동 방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상호텍스트를 운위할 때 간과되는 부분은, 이 개념의 최초 입안자들이 가리킨 사태는 이런저런 레퍼런스를 활용해 또 다른 텍스트를 생산하는 식의 의식적 작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방점은 주체가 텍스트―글뿐만 아니라 감각과 경험, 기억과 무의식의 총체―로 구축된다는 것, 주체마다 그 짜임이 모두 다르다는 것, 상호텍스트는 주체가 쓰거나 읽는 체험의 순간에만 발현된다는 것, 따라서 오히려 주체의 고유성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거미줄의 망을 떠올려 보자. 우리들 각자는 무수히 많은 텍스트의 거미줄로 연결됨과 동시에 따로 떨어져 존재하며, 나를 관통하는 선들의 짜임은 그 누구와도 같지 않다. 

 

시계를 더 멀리 되돌려 보자.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에 등장하는 미스터리한 가상의 개념 ‘일반의지’는 인민(demos)이 다스리는(kratein) 근대적 통치의 근간이 되는 희대의 발명품이다. 일반의지란 공동의 이익을 향하는 인민의 의지이며, 이것이 지휘하는 권력이 주권이다. 그렇다면 개별 구성원의 총의나 여론 같은 것인가? 루소는 이렇게 기술한다.

 

“전체의지는 사적인 이익에 몰두하는 개별의지의 합일 뿐이다. 그런데 이 개별의지들에서 서로 상쇄되는 더 큰 것들과 더 작은 것들을 빼면, 차이들의 합계로 일반의지가 남는다. 만약 인민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심의할 때, 시민들 사이에 어떤 의사교환도 없다면, 엄청나게 많은 수의 작은 차이들로부터 언제나 일반의지가 도출될 것이고, 심의는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 모호한 수학적 기술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할 테다. 다만 여기서 대비되는 것을 통계적 평균과 차이들의 집합으로 본다면, 루소가 상정한 것은 아마도 차이가 사상되고 하나로 수렴되는 통합 과정이기보다는 개별적인 차이를 보존한 채 성립하는 하나이지 않을까?

 

일본의 한 사상가는 정보기술의 성과에 힘입어 공적인 것(res publica)을 다루는 정치체(corps politique), 즉 공화국(rpublique)의 버전 업을 꿈꿨다(아즈마 히로키,『일반의지 2.0』, 2011). 일반의지를 사회의 집합적 무의식 같은 것으로 이해할 때, 개개인의 무의식적 욕망의 패턴, 말하자면 라이프로그―텍스트라 불러도 무방하다―가 집적된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그 집합적 무의식이 여러 방향성을 보존한 채 가시화될 수 있다는 희망이다. 저 사상가가 꿈꾼 상태는 적어도 표면적 심상으로는 인공지능의 상용화와 더불어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어떠한 의사교환도 없이, 엄청나게 많은 수의 작은 차이들로부터, 언제나 도출되는 일반의지”라는 추상적 이념의 실체화. 이 사물은 이제 우리 모두의 욕망의 기록이 저장된 몸체(corps)를 지니며, 황량한 부지 어딘가에서 전기를 먹고 발열하는 이 사물은 손쉽게 인격의 시뮬라크르를 부여받는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경험, 예외성, 미묘한 차이가 소거된 채 평균으로 향하는 이른바 추계적 앵무새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한 듯하다.

 

프로이트는「정신분석의 한 가지 어려움」에서 인류의 나르시시즘에 충격을 준 세 가지 굴욕을 얘기했다. 천문학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일깨웠고, 생물학은 인간이 동물의 동류임을 일깨웠고, 심리학은 인간이 자기 정신의 주인이 아님을 일깨웠다. 우리가 만일 새로운 기술 앞에서 네 번째 굴욕을 느껴야 할 때가 온다면, 그것은 이 인공물이 인간의 역량을 넘어설 때도, 사고의 단순 외주화가 이루어질 때도 아닌, 자각하지도 못한 채 사고의 주권을 양도하게 될 때일 것이다.

 

히포므네마는 메모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읽은 것, 들은 것, 생각한 것을 적는 개인 기록이었다. 우리가 이 단어에서 간직하려는 것은 단순히 정보 저장 도구의 이미지가 아니라 자기반성과 수양으로서의 사유의 수첩이라는 이미지다. 이는 또한 굴욕을 굴욕으로 느끼기 위해 요구되는 실천을 상징한다. 혼자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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