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한석현의 히포므네마

 

 

 

 

 

 

 

 

 

 

자유롭게 반복되는 해로운 말들,
끊임없이 호명하고 무언가를
‘행하는 말’들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눈감고 지나칠 것인가,
검열하고 처벌할 것인가, 다른 발화,
다른 ‘행하는 말’로 오작동시킬 것인가?


두 세기 전 프랑스를 강타한 베스트셀러 한 편을 뒤적거려 본다. 에두아르 드뤼몽(1844~1917)은 제3공화국 시기를 살았던 인물로 초기에는 주로 예술 칼럼을 기고했다. 40대 초반까지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주변부 언론인이였던 그가 논객이자 정치 활동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는 1886년『유대인의 프랑스』출간이었다. 1,200쪽 분량에 두 권으로 구성된 책은 출간 첫해만 6만 부 이상이 팔렸고, 이후 600쪽짜리 보급판으로 정리돼 1914년까지 200쇄 가량 재판을 거듭했다.

 

내용은 한마디로 프랑스의 정치, 경제, 언론, 문화, 금융 전반이 유대인 네트워크에 의해 암암리에 지배받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여파가 한창이었다. 알자스-로렌 지역 할양, 연간 국가예산의 3배에 달하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 지급, 프로이센군의 프랑스 주둔 등 종전을 대가로 체결된 조약은 유럽의 중심을 자처하던 프랑스인들에게는 감당키 어려웠을 것이다. 쇠퇴와 불안은 엉뚱하게도 특정 민족의 영향력 확대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는 방향으로 흘렀다.

 

드뤼몽은 프랑스 사회 내부로 침투한 보이지 않는 외부의 적이 나라를 좌우하고 있다는 허구의 서사를 사실의 외양으로 포장한다. 유대인 가문의 실명과 가계,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주요 직책들을 열거하는 인명 목록, 역사적 단편과 실제 사례를 인용하는 아카이브적 방식은 마치 사실을 집적해 놓은 것 같은 신빙성을 연출한다. 물론 증거의 몽타주들은 대부분, 많게 봐야 몇 만에 불과한 프랑스 유대인 수를 50만이라고 부풀리는 식의 통계 왜곡, 맥락을 제거한 선택적 인용과 과장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에 더해 ‘잠식’, ‘침투’, ‘기생’과 같은 생물학적이고 전염병적인 은유를 동원해 분노와 상실감에 호소하는 선동적 문체를 구사하며, 우생학적 담론에 근거한 인종 묘사도 서슴지 않는다. “그 유명한 매부리코, 깜박거리는 눈, 옥니, 툭 튀어나온 귀, 네모진 손톱, 긴 상체, 불거진 복사뼈, 흐느적거리며 물렁거리는 위선자, 변절자의 손(…) 유대인은 피의 부패를 나타내는 모든 병에 걸렸다.”

 

이러한 상징 조작은 저자 개인의 상상의 소산이 아니다. 저자는 대중의 관념 속에 각인된 이미지들과 공중에 떠도는 무수히 많은 말들을 수집해 집대성해 놓았을 뿐이다. 문제는 이 같은 말의 덩어리들이 단순한 관념으로 머무른 것이 아니라 정치와 안보의 영역에서 실제적으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드뤼몽은 1892년 ‘자유 발언’을 제호로 하는 신문을 창간해 해로운 말들을 자유롭게 쏟아내며 드레퓌스 정국을 주도했고, 이후 이 말의 씨앗들이 유럽 전역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모두가 아는 바다.

 

여기서 굳이 옛 사례를 언급하는 이유는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끌어내기 위함도, 이미 신화화된 박해의 역사에 또 하나의 말을 보태기 위함도 아니다. 지금 우리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직접적으로 지칭하지 않고 말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저 책이 즉각 환기하는 지금 이곳의 사태, 우리와 이웃한 어떤 민족을 둘러싸고 넘쳐나는 말들, 놀이화된 혐오 표상들, 두 세기 전 유행하던 말들과 놀라울 만큼 닮은 그 말들에 대해, 그것들을 반복 재생하지 않으면서 사고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시간과 장소를 바꿔가며 나타나는 역사의 반복이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지만,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처참한 말들을 공중에 유포시키는 자들과 이스라엘 국기를 쳐들고 광화문에 출몰하는 이들이 입을 모아 ‘정보 유출’―드레퓌스가 받은 혐의 또한 기밀 유출이었다―을 성토하는 웃지 못할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도하면서,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는 마르크스의 중얼거림이 과연 옳았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특정 민족의 선거 개입을 강변하는 현수막을 무심히 지나치며, 웹을 떠도는 비천한 밈들을 스쳐 보내며, 그 말들이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이제 막 체험한 우리로서는, 이를 단지 허무맹랑한 망상이나 우스꽝스러운 장난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다시 한번 거리를 두고 사태의 간단치 않음을 이해하기 위해, 서구권에서 혐오 발언 규제법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던 1997년 출간된 주디스 버틀러의 Excitable speech(국내에서는 2019년 『혐오 발언』으로 번역, 소개됐다)를 과거의 저 책과 맞세워 보자.

 

첫째, 말은 곧 행위다. 발화는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무언가를 행한다. 저 책에 담긴 말은 ‘유대인이 프랑스를 지배한다’는 사실을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적으로 만들고, 사회적으로 그렇게 취급되도록 하는 행위다. 둘째, 누군가를 어떤 이름으로 부를 때, 우리는 단지 지칭하는 게 아니라사회적 위치를 부과한다. 유대인을 악덕 금융가, 침입자, 내부의 적으로끊임없이 호명하는 것은 주체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를 구성하고, 사회적으로 그러한 위치에 고정시킨다. 셋째, 발화의 수행성은 반복가능성에서 나온다. 말은 한 번 말해지고 끝나는 게 아니라다시 말해질 수 있기에 힘을 행사한다. 드뤼몽은 이 점을 직관적으로 간파했다. 한 번 산포된 말은 개별 주체를 떠나 동일한 서사를 반복하며 계속해서 재수행된다. 오직 유통되는 말들이 있을 뿐, 기원에 놓인 단일한 텍스트란 없다.

 

그렇다면 자유롭게 반복되는 해로운 말들, 끊임없이 호명하고 무언가를 ‘행하는 말’들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눈감고 지나칠 것인가, 검열하고 처벌할 것인가, 다른 발화, 다른 ‘행하는 말’로 오작동시킬 것인가?

한석현 방송대 교수·프랑스언어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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