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룰을 파악하고 스크린 속
세계를 탐험하는 속도,
각종 인터페이스를 조작하는 능력,
가상현실의 객체를 다루는 기술이
학습 성과와 디지털 문해력을
좌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잘 노는 학생이 공부도 잘한다’는
속설이 다시 한번 증명될 것이다.
지난 <KNOU위클리> 266호에선 국내외 교육계가 개발 중인 ‘가상실험·실습 콘텐츠’와 게임(컴퓨터, 콘솔, 모바일 기기로 구동하는 비디오게임)의 관련성에 대해 소개했다. 실제로 방송대를 비롯한 세계 각국 교육기관들이 가상현실(VR)과 확장현실(XR) 등의 기술을 활용해 제작 중인 학습 콘텐츠들은 3차원 게임의 그래픽 렌더링 기술, 상호작용 방식, 가상현실 구성, 아바타 형태 등을 원용하고 있다. 이번 커버스토리에선 게임을 비롯한 영상 매체 연구에 매진해온 미디어영상학과 김옥태·이성민 교수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미래의 방송대 원격교육과 게임의 관련성에 대해 알아본다.
이현구 기자 zuibm@knou.ac.kr
게임에 관한 새로운 관점
TED 강연과 『게임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 등의 저서에서 사회 전 영역에 게임 메커니즘을 도입함으로써 참여자들의 동기를 촉진하고 생산성을 제고하자고 역설한 제인 맥고니걸(Jane McGonigal)은 게임과 학습이 “제시된 규칙을 익히고 시행착오를 거쳐 숙련도를 높여야 하며, 시간과 노력을 들여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본다. 캘리포니아의 미래 연구소 개발 부문 이사로 재직 중인 그는 △자발적 동기 부여와 흥미 유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경쟁과 협력 △지속적 몰입 유도 등 게임의 요소를 적용해 교육과 학술연구의 성과를 높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기후 변화나 민주주의의 퇴행 같은 전 지구적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월스트리트 저널>, <비즈니스 위크>, <MIT 테크놀로지 리뷰> 등의 매체에서 ‘미래 혁신을 이끌 리더’로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교육 분야에 초점을 맞춰보면, 세계 각국의 교육기관과 관련기업들은 게임 제작 기법을 활용해 여러 가지 VR·XR 학습 콘텐츠를 개발 중이다. 물론 게임의 교육적 활용 시도와는 정반대로 게임을 ‘폭력성을 조장하고 학습을 방해하며 중독을 야기하는 유해 활동’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디지털 미디어와 사이버 문화, VR 기술의 교육적 활용 등을 연구해온 김옥태 교수는 기본적으로 맥고니걸의 견해에 공감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게임 산업의 매출 규모는 2020년경 영상 및 음반 산업의 매출을 합친 것보다도 더 커졌고 그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경제 논리 외에 한편으론 게임을 많이 하는 걸 중독이라고 볼지도 고민해야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결정에 따라 우리나라도 ‘게임 중독’이라는 질병 분류를 공식화할 것인지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다. 게임에 몰입하는 청소년 중 80%는 나이가 들면서 게임에 흥미를 잃는 것으로 보고됐고, 알코올·약물·도박 중독과 달리 자연적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흉기가 될 수 있다고 해서 주방용 칼 소유를 금지할 수 없듯이, 부정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둔 규제는 지양해야 한다.”
영상·문화 산업과 K-콘텐츠의 전망에 대한 연구와 기고를 활발하게 진행해온 이성민 교수는 게임과 영화(및 드라마)는 스토리텔링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 “관객이 수동적으로 이야기를 전달받는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게임 플레이어는 일차적으로 게임 속 세계와 상호작용해 이야기 전개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온라인 게임일 경우엔 이차적으로 다른 플레이어와도 상호작용한다. 바로 이것이 게임의 차별성이고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오래, 더 깊게 몰입하게 되는 요인이다.”
교육과 게임의 접목, 현재와 미래
현재까지 여러 기관이나 기업이 개발한 가상실험·실습 콘텐츠는 3차원 그래픽의 시뮬레이션 게임과 조작 방법, 가상현실의 형태, 상호작용 조건과 패턴 등이 유사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 차이가 있다.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학습 콘텐츠들은 처음엔 신기하게 느껴지고 호기심을 자아내지만 한 콘텐츠에서 얻을 수 있는 성과가 제한적이고, 별다른 서사 없이 주어진 몇몇 과제만 수행하게 돼있으며, 감동을 자아내는 시청각적 요소가 결여돼 있다.
게임 요소의 교육적 활용에 대해 김옥태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유희가 아닌 교육·훈련·연구 등의 목적으로 활용하는 게임을 ‘serious game’ 혹은 ‘기능성 게임’이라고 하며, 군인의 훈련을 위한 군용 시뮬레이션이 그 시초다. 국내외에서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크게 성공한 사례는 아직 없어 많은 연구와 개선이 필요하다.”
실제로 교육기관이나 관련기업에서 만든 게임이 유의미하게 활용된 사례는 드물고, 성공 사례로 분류되는 기능성 게임은 대부분 게임 제작사의 작품들이다. 유명 샌드박스 게임의 교육용 버전인 「마인크래프트 에듀케이션」은 STEM 교육의 도구로 채택돼 25만 명 이상의 학생이 이용 중이고, 「테트리스」는 북미와 유럽 대학의 연구 결과 인지기능 촉진, 손과 눈의 협응성 향상, 정신적 외상 극복 등의 효과가 입증돼 치료와 지능 개발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도시 건설·경영 게임인 「심시티」는 서울대 지리교육과 수업에 적용됐으며, 동서양의 다양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국내외 초중등교육 현장의 몰입형 역사교육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교육계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고 있는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주인공이 암살자라는 점은 매우 역설적이다(교육 현장에선 암살과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로 시공간을 돌아다니는 ‘디스커버리 투어’ 모드가 활용된다).
처음부터 교육 목적으로 개발한 게임이 각광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성민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러 교육기관이 게임 저작도구를 도입해 만든 학습 콘텐츠가 널리 쓰이지 못하는 것은 새로운 학습 방식과 그에 적합한 교육과정 설계에 관한 노하우가 축적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방송대가 원격교육 모델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것은 영상 매체를 고려한 교육과정 설계 덕분이었고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이다. 가상실험·실습 콘텐츠가 단방향 영상 학습 시대의 교육과정 설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으므로, 양방향 상호작용을 고려한 교육과정 설계를 위한 논의와 협력이 필요하다.”

방송대 원격교육과 게임
본격적인 가상실험·실습 시대가 오기 전에 게임을 해두면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비디오게임 초창기부터 게임을 즐겨왔고 게임을 소재로 학위논문을 발표했던 김옥태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게임 요소를 교육에 도입하려는 것은 원격교육의 미래가 ‘교육적 메타버스’의 성패에 달려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시뮬레이션인 메타버스 실현에 가장 근접해있는 분야는 게임이고, 메타버스나 가상실험·실습 콘텐츠에 적용되는 VR·XR 및 그래픽 렌더링 기술도 게임에서 가장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방송대인은 물론이고 지역 주민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방송대 가상실험·실습 체험관엔 총 4대의 체험용 장치가 마련돼 있다. 이 체험관이 제공하는 12가지 콘텐츠에 대해 이용자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담당 직원의 설명이다. “많은 이용자는 콘텐츠가 아주 사실적이고 조작하기도 쉽다며 호평한다. 평소에 게임을 하는 분이나 박물관 등에서 가상현실 콘텐츠를 경험해본 분이 더 잘 적응하는 편이고,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분은 힘들어하거나 멀미 증상을 호소하기도 한다.” 3차원 게임, 그중에서도 1인칭 시점의 게임 또는 그런 게임과 유사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가상실험·실습 콘텐츠를 사용할 때 멀미 증상을 경험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이런 증상은 사용자가 3차원 게임에 익숙하지 않을 때, 그리고 모니터나 TV 같은 보편적인 디스플레이 장치가 아닌 VR·XR 기기를 사용할 때 더 심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교수는 게임이 디지털 문해력 증진에도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지뢰찾기」가 마우스와 GUI 적응을 도운 것처럼, 「애니팡」을 비롯한 초창기 스마트폰 게임들은 중년기 이상이 스크린 터치 방식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오래전부터 게임은 새로운 IT 기기에 적응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성민 교수는 최근 게임만의 장점을 직적 경험한 사례를 들려준다. “자녀들이 「귀멸의 칼날」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만화와 애니메이션엔 잔인한 묘사가 많았다. 그런데 게임 버전은 시각적 잔혹성이 크게 순화돼 아이들과 함께 직접 조작하면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감상하고 풀어나갈 수 있었다.” 이 교수의 언급처럼, 자녀를 둔 많은 성인들이 게임을 아이들과 소통하고 함께 놀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무인도에 정착해 마을을 만들어가는 닌텐도의 「모여봐요 동물의 숲」을 아이와 함께 플레이 하면서 서로의 마을에 방문하기도 하고, EA 스포츠의 「FC」 시리즈에 구현된 프리미어리그 구단을 골라 축구 대결을 즐기기도 한다.
지난해에 각종 게임 관련 시상식에서 '올해의 게임'으로 선정된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는 스토리텔링, 그래픽아트, 배경음악 등의 다양한 요소에서 숱한 찬사를 받았고, 이런 걸작들 덕분에 <포브스>, <뉴욕 타임스> 등 유력 언론조차 게임을 대중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한 지 오래다.
가까운 미래에 방송대 학습 콘텐츠의 주류가 단방향의 영상 시청이 아니라 양방향 상호작용이 요구되는 가상실험·실습으로 대체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누군가는 새로운 학습 방식에 쉽게 적응해 소기의 성과를 얻는 반면,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3차원 화면에 멀미를 호소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게임의 룰을 파악하고 스크린 속 세계를 탐험하는 속도, 각종 인터페이스를 조작하는 능력, 가상현실의 객체를 다루는 기술이 학습 성과와 디지털 문해력을 좌우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잘 노는 학생이 공부도 잘한다’는 속설이 다시 한번 증명될 것이다.
가상실험·실습을 대비한 게임 첫걸음, 어떻게?
이 글의 내용에 동의한다고 해도, 게임을 해본 적이 없다면 막막할 것이다. AI 데이터센터의 수요 폭증으로 인해 GPU나 램 같은 PC 부품의 시세가 금값인데 최신 3차원 그래픽이 적용된 게임을 플레이 하기 위해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하려면 너무 많은 비용이 들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표적인 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인 STEAM에 가입한 후 살펴보면 가상실험·실습 콘텐츠와 기본적으로 유사한 3차원 가상세계를 표현했는데도 고성능 PC를 요구하지 않는 게임들도 많다.
하드웨어는 그렇다 쳐도 게임 소프트웨어도 수만 원대이니 경제적으로 부담되진 않을까? 역시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STEAM의 경쟁업체인 에픽 스토어에선 다양한 유료 게임을 거의 매주 하나씩 무료 배포 중이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게임이 무료 배포될 때까지 기다리기 어렵다면 가끔은 구입해볼 만하다. 대다수의 게임이 한 번 사면 엔딩을 보기까지 수십 시간 동안 즐길 수 있으니 영화 관람보다도 더 저렴한 셈이다.
넷플릭스 가입자라면 게임 카테고리에 주목해보자. 넷플릭스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노력 중 하나로 모바일 게임도 제공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모바일 게임은 대체로 과금 부담도 적고 게임 시작 전에 광고를 보며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게임을 하면 좋을까? 제인 맥고니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게임은 본질적으로 학습에 가깝다곤 하지만, 가상실험·실습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게임은 따로 있다. 3차원 그래픽을 채용한 게임 중에서도 1인칭 시점을 취한 게임, 0.01초 단위의 판단과 입력을 통해 경쟁하는 게임이 아니라 가상현실을 음미하면서 그 안의 객체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법을 천천히 배워갈 수 있는 게임들이다. 종종 '○○ 시뮬레이터'라고 불리는 이런 종류의 게임을 해보면 가상실험·실습 콘텐츠들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직접 체감할 수 있다.
게임을 배우기엔 너무 늦지 않은 걸까? 역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배움에 늦은 나이란 없듯이, 맥고니걸의 말처럼 학습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게임을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다. 우리 모두는 삶 속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이미 게임을 하고 있기도 하다. 막상 해보니 게임 실력이 잘 안 느는데 어쩌지? 프로 게이머로 성공할 생각이 아니라면, 스크린 속 가상세계에 참여해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현실과 닮은 듯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을 탐험하면서 '가상실험·실습'이라는 새로운 배움의 문을 여는 열쇠를 찾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