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에 부스케는 “삶은 나날들이 아니다, 삶은 밀도다”라고 했다.
이제 AI를 활용하는 영역이 매우 늘어나서 창작의 영역에서 AI를 활용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도 자기만의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현장에서 보건대 도리어 점점 늘어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멋진 글을 써달라고 AI에게 부탁하지 않고 직접 쓰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을 걷다가 문득 어떤 기억을 되살리고 한없이 그 기억을 따라가곤 한다. 그러다 이 모든 기억들이 현재에서 불러온 것임을 깨닫고 그 순간이 매우 충일해지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어떤 기억은 한 사람의 삶의 여정 속에서 뜬금없이 종종 불려오기도 한다. 그는 기억을 불러올 때마다 해석이 덧입혀져 변주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성장하며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옮기고자 한다.
우리는 안다. 창작이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고유한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그 이미지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임을. 자신의 삶을 밀도 있게 느끼는 순간은 바로 그때라는 것을.
문학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본 자’만이 쓸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사회에서 배운 어머니라는 보편적 이미지 외에 자신의 어머니만의 독특한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안다. 어떤 부모 아래 자랐으며 어떤 유년을 보냈는가, 하는 삶의 초기 조건 위에 결핍과 상실, 사랑으로 충일한 순간과 배신의 무게를 몸으로 겪은 경험,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느낀 그 사람의 시선과 목소리, 소중한 이와의 어긋남을 포착하는 짧은 찰나 등을 글로 쓴다. 이런 것들은 데이터로 학습할 수 없는 영역이다. AI가 슬픔이라는 단어의 용례는 완벽히 구사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다음 날 아침 칫솔을 드는 손의 떨림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바로 그런 순간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바다로 나가 주낙을 놓는 것과도 같다. 제주도 앞바다에 주낙을 드리우고 줄을 끌어당기면 은빛 찬란한 갈치가 바닷물을 차고 파다닥 달려온다. 강릉 안목항에 가서 주낙을 드리우면 바다에서 남대천으로 거슬러오르는 은어를 낚을 수 있다. 우리 삶의 어느 곳에 낚싯줄을 드리우는가 하는 것에 따라 낚아올릴 수 있는 것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AI가 할 수 없는 영역이다. AI는 도구로서 협업할 수 있지만, 그 글의 관점은 오롯이 글을 쓰는 사람의 몫이다.
AI가 확률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평균적인 답을 내놓는다면, 문학은 그 통념에 균열을 낸다. “정말 그럴까?” “왜?”라고 질문한다. 사회에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낯설게 보게 한다. 자신만의 글을 통해 통념에 저항하고 새로운 윤리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그렇기에 문학적 글쓰기는 때로 비효율적이고, 모호하고, 정답이 없다. 슬픔에 대해 말할 때 슬픔의 종류와 결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상실을 겪은 누군가의 시선으로 우회하여 보여주며 의도적인 침묵을 행간에 부여한다. 독자를 잠시 멈추게 하여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주고 비로소 작가와 독자는 공감의 영역 안에 함께 놓이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언어를 발견하는 밀도 높은 순간들, 그게 바로 AI 시대에도 문학 교육이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