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각자의 세계 내 존재 방식은,
다르고자 하는 욕망과 같고자 하는 욕망,
시대를 거스르고자 하는 욕망과
시대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
비시의성과 동시대성 사이를 줄타기한다.
젊은이들에게 물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다수가 가정생활, 직업적 성공, 물질적 안락함 등의 항목에 복수 응답한다. 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전혀 관심 없다’와 ‘거의 관심 없다’가 과반이다. 어떤 종류의 직업을 선호하는가? 보수는 적지만 안정적이고 조용한 직장과 위험부담이 있지만 보상이 큰 일이 비등하다. 물질적 차원에서 무엇이 부족하다고 느끼는가? 휴가, 여가, 자가용, 주거의 응답률이 높다.
이 응답은 1957년 주간지 <렉스프레스>와 프랑스여론조사연구소가 18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1927~1939년생)들에게 행한 조사의 일부다. 조사결과는 10월 3일부터 세 달에 걸쳐 연재되었고, 첫 회 표제는 ‘누벨바그(Nouvelle Vague)’, 즉 “‘새로운 물결’이 온다”였다.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언급되는 누벨바그라는 이름은 언론이 만들어낸 세대론, 슬로건에서 파생된 레테르였다.
젊은이들의 가치관과 태도를 파악하기 위한 24가지 문항은 ‘영광의 30년’이라 불린 전후 호황기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의식을 드러내줬다. 조사를 기획한 프랑수아즈 지루는 이들을 체제 전복적 세대가 아니라 전후 번영 속에서 새롭게 형성된 소비·개인주의 세대로 분석했다. 집단적 이념보다는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는 탈이념적 성향과 실용주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자율성을 확대하고자 하는 가족관, 자신들이 부모 세대와 다르다는 의식을 지닌 채 다르게 살고 싶은 세대의 출현. 굳이 집어 말하지 않아도 손쉽게 감지되듯 이후로도 이름을 달리하는 각종 세대론이 운위될 때면 시간과 장소의 괴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등장하는 낯익은 레퍼토리다.
어떤 반응이 있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 고릿적부터 젊은이는 세상에 불평을 쏟아냈고 늙은이는 세태에 혀를 찼다. 우리들 각자는 모두 자기 시대의 요즘 애들이었고 요즘 애들을 위한 나라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우리는 모두 자기 시대가 특별하다고 또는 특수했다고 믿고 있을 뿐 새로울 것은 없다며 냉소를 보낼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세대의 낙인을 거부하는 이들을 본떠 세대론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세대 간의 차이는 개인차를 넘어서기 어렵다고 외칠 수도 있다. “누벨바그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1959년 8월 11일 <르몽드>가 던진 질문에 몇몇 감독이 답한다.

자크 타티, “나는 ‘물결’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 감독은 언제나 있었고, 자력으로 등장해왔다.” 라울 레비, “나는 누벨바그가 거대한 농담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새로운 감독 세대는 존재해왔다.” 조르주 프랑주, “누벨바그는 광고적 소용돌이에 불과하다.”르네 클레르, “‘새롭다’는 말은 새로운 방법이나 새로운 스타일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다.”장 르누아르, “나는 새로운 감독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18세에서 30세 사이의 아주 뛰어난 감독들이 선배들처럼 영화를 만들고 있을 뿐이며, 새로운 감독이든 옛 감독이든 언제나 좋은 감독과 나쁜 감독이 있을 뿐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불편하게 느꼈던 지점이 있다면 세대를 말하는 담론 속에서 각 개인의 개별적 차이와 고유성이 거세된 채 동일성의 틀로 포획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담론은 세 가지 술책을 부린다. 집단적 분류, 단절의 서사, 상징적 인물과 형상의 제조. 이 점에서 모든 누벨바그는 ‘사건’이 아니라 ‘명명’이다.
켜켜이 쌓인 의미층이 역어 선택을 난감하게 만드는 ‘모던’이라는 말은 본래 어원상 ‘모데르누스(modernus)’, 단순히 ‘요즘’을 뜻한다. 이 단어 안에 특정 시대를 ‘모던’으로 고정하는 절대적 시간 개념은 없으며, 단지 상대적 시간 감각이 들어 있을 뿐이다. 역사상 존재했던 많은 신과 구의 논쟁들, 십여 년 단위로 등장하는 각종 세대론은 그 시대의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한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떤 세대로 규정하는 것 혹은 타인이 부과한 명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볼 때 신에 속하든 구에 속하든 시대의 조류에 순행하는 것이다. 모두가 시대에 역행할 필요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기만의 존재 방식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갑자기, 모던하지 않다는 것에 초연하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전위 이론의 기수였던 롤랑 바르트가 60대에 쓴 일기에서 발견되는 구절이다. 1915년생으로 누벨바그의 시점으로는 구세대에 속했지만 한편으론 그 시대 모던의 상징적 형상이기도 했던 그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당대의 관습과 전통을 해체하고(moderne), 전진적 방식으로 모더니티를 급진화하고(post-moderne), 후진적 방식으로 모더니티에 맞서 죽은 것을 사랑하고(anti-moderne), 그 모든 것을 다 지나온 이가 도달하게 된 이후의 관점(aprs-moderne)일까? 이 점은 분명하다. 우리들 각자의 세계 내 존재 방식은, 다르고자 하는 욕망과 같고자 하는 욕망, 시대를 거스르고자 하는 욕망과 시대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 비시의성과 동시대성 사이를 줄타기한다. 누벨바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미남 세르주」로 스물여덟에 데뷔했고, 그 세대 감독 중 가장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었으며, 이후 스릴러 영화의 거장이 되어 프랑스의 히치콕이라 불린 청년 클로드 샤브롤이 <르몽드>에 내놓은 답변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물결’의 일부라고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물결이 있다면 중요한 것은 수영할 줄 아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