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복잡한 것은 복잡하게
추상적인 것은 추상적인 언어로 난해한 대상은 난해함 자체와
함께 사유할 권리가 아닐까
“어려워요!” 수업 중에 자주 듣는 하소연이다. 프랑스어가 어렵다는 사실확인적 발화인지, 단순한 감정의 토로인지, 비법을 알려달라는 말인지, 그저 가벼운 친교성 발화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지…. 매번 무반응으로 반응할 수만은 없기에, 형식적인 격려와 진심을 담은 대답 사이에서 망설이다 교육적 발화로 위장한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다.
“‘difficile(어렵다)’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포괄적입니다. 여러 층위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이나 제라르 주네트의 서사 이론처럼 ‘complexe(복잡한)’할 수도,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이나 데리다의 해체론처럼 ‘obscur(난해한)’할 수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나 헤겔의 정신현상학처럼 ‘abstrait(추상적인)’할 수도 있습니다. 외국어를 익힐 때의 어려움은 이와는 다릅니다. 동사변화와 기초 어휘를 암기하고, 성·수 일치와 관사 체계를 습득하고, 전치사의 용례를 구별하는 일, 미지의 언어로 하나의 세계를 다시 세우는 일은, ‘laborieux(고된)’하고 ‘pnible(힘겨운)’한 일입니다. 추상적이고 복잡한 난해함이라기보다는 반복, 암기, 훈련,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의 축적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관건은 악기 연습이나 수영 연습처럼 매일매일 반복을 통해 몸에 새겨 넣는 신체적 습관의 형성, 즉 노동에 있습니다.”
이쯤 되면 차게 식는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할 말을 마저 할 때도 있다. 요컨대 “편히 갈 수 있는 비법 같은 것은 없습니다. 누군가 내 머릿속에 대신 입력해 줄 수도 없습니다(근래의 기술 발전을 보면 실현불가능한 SF적 상상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 땡볕 아래 끝도 없는 밭을 매듯, 짐을 진 채 완만한 경사를 오르듯, 지난하게, 천천히, 나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어렵다’는 말을 다른 맥락에서 듣게 될 때면,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해진다. 가령 어떤 글이나 문학 강의 등에 대해 어렵다는 반응이 나올 때, 과연 무엇이 어렵다는 것일까? 물론 그 안에는 앞서 말한 difficile의 여러 함의들이 조금씩 다 들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뉘앙스가 덧붙는다.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말한다’, 더 나아가 ‘그런 방식은 옳지 않다’는 가치판단이다. 이때 ‘어렵다’는 말은 단순한 표명이 아니라 요구로 전환된다. 즉 지식이나 사유가 더 쉽게, 더 간단하게, 더 즉각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형태로 제시돼야 한다는 일종의 사회적 요구, ‘핵심만 말하라’,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라’, ‘무슨 쓸모가 있는지 말하라’는 압력을 내뿜는다.
‘푸자디슴(poujadisme)’이라는 말이 있다. 본래 1950년대 프랑스에서 피에르 푸자드가 이끌었던 소상공인 중심의 정치운동을 가리킨다. 세금, 국가행정, 관료제, 의회정치 등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 이 운동은 이후 더 넓은 의미로 평범한 사람들 또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전문가, 지식인, 기술관료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공격하는 반지성주의적 태도를 가리키게 됐다. 지식인의 말, 문체, 개념어, 설명 방식에 불신을 드러내며, 사유의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보다 그 사유가 표현되는 방식을 문제 삼는 식이다. 오늘날 이 용어는 ‘왜 그리 어렵게 말하는가’, ‘왜 일상적인 말로 하지 않는가’, ‘현실과 동떨어진 말이 아닌가‘라며 지식인의 언어 자체를 의심하고, 불필요한 복잡성, 허세, 말장난, 현실 감각의 결여로 간주하는 경우를 일컬을 때 사용된다.
한 평론가가 남긴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신랄하면서도 처연한 계급 우화”라는 한 줄 평이 조소와 더불어 회자된 현상에도 일면 그런 푸자디슴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 하겠다. 아이러니한 점은 대중의 조소를 샀던 그 평론가가 ‘서울대 필독서『총, 균, 쇠』를 한 번에 정리해 드립니다’류의 지식의 통속화(vulgarisation) 경향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한국식 푸자디슴의 역설적인 특징이 있다면, 이른바 ‘인문학적 사유’의 중요성을 강변하는 담론이 오히려 지식의 극단적 통속화와 결합해 나타나는 현상에 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5분 안에 정리해 드립니다’ 형식의 콘텐츠를 양산하는 척척박사류의 대중 지식인의 출현이 그런 현상의 하나일 것이다.
물론 지식의 통속화가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은 의미의 통속화는 지식이 자기 폐쇄성에서 벗어나 더 넓은 청중에게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일 수 있다. 이때 통속화는 지식의 단순한 희석이 아니라 복잡성을 보존한 채 다른 형태의 언어로 변환되는 작업이다. 그에 비해 나쁜 통속화는 복잡성을 제거하고 접근 가능성만을 남긴다. 전자는 독자를 사유의 과정으로 초대하지만, 후자는 독자에게 이미 정리된 결론을 제공하고 지식을 소비 가능한 정보 상품으로 재가공한다. 사유의 과정을 즉각적인 요약이, 개념의 긴장을 기억하기 쉬운 문구가, 문제의 복잡성을 핵심 정리가 대체한다.
이 지점에서 소위 ‘지식의 민주화’라 불리는 것과 푸자디슴이 기묘하게 만난다. 사유, 교양, 성찰은 짧고 명쾌하고 즉각적으로 이해 가능한 형태로만 허용되는 것이다. ‘인문학적 사유’는 강조되지만 정작 사유가 요구하는 우회, 지연, 난점, 고됨, 섬세함, 개념적 노동은 제거된다.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복잡한 것은 복잡하게, 추상적인 것은 추상적인 언어로, 난해한 대상은 난해함 자체와 함께 사유할 권리가 아닐까.
한석현 방송대 교수·프랑스언어문화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