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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란 격자의 틀에 갇힌 부동의 실체가 아니라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미시적 운동은 아닌가

 

나탈리 사로트의 소설『향성』에는 주인공이 없다.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선형적 줄거리도, 이렇다 할 사건도 없고, 배경도 분명치 않다. 첫 출간된 1939년 당시에는 조금이나마 인식의 틀을 제공해줄 ‘누보 로망(Nouveau roman)’이니 ‘반-소설(anti-roman)’ 같은 명명법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마음 붙일 구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 작품에도 읽기를 붙잡아줄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24편의 단장으로 이루어진『향성』을 인간 내면의 움직임을 기록한 불안정한 사전처럼 읽어본다면 어떨까. 그 낯선 감각을 단번에 와닿게 할 대목을 짧은 지면에 끌어오기는 어렵다. 다만 유행하는 심리 유형론과 대조시켜 본다면 이 작품이 포착하려는 사태의 윤곽을 그려볼 수는 있겠다.

 

여덟 개의 알파벳을 네 쌍의 선택지로 나누고 그 조합을 통해 16개의 성격 유형을 만들어내는 대중적 심리 유형론의 매력은 복잡다단한 인간을 빠르게 식별가능한 기호로 바꿔준다는 데 있다. 그 기호는 나 자신과 타인을 익숙한 언어 안에 배치해, 마치 사람을 이해했다는 안정감을 준다. 침묵의 순간을 메워주는 가벼운 대화 소재일 뿐 굳이 정색할 필요야 있겠느냐만, 그 가벼움이 성찰을 면해주지는 않는다. 네 글자의 기호는 한 사람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인간을 너무 빨리 이해했다고 믿게 만든다. 인간에게 과연 고정된 성향이란 것이 있는가. 성향이란 이미 정해진 이름이 아니라 타인과 세계가 우리 안에 일으키는 희미한 방향 전환들의 흔적은 아닐까.

 

나를 네 글자로 라벨링할 때, 타인과 매 순간 새롭게 부딪히며 발생하는 심리적 파동의 불규칙한 결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 감정이란 격자의 틀에 갇힌 부동의 실체가 아니라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미시적 운동은 아닌가. 사로트의『향성』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처럼 읽힌다.

 

‘향성(tropisme)’은 원래 생물학에서 온 용어다. 식물이나 고착성 동물이 빛이나 중력 같은 외부 자극에 불수의적으로 반응해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는 성질을 가리킨다. 사로트는 이 말을 인간 내면의 미세한 반응들에 적용한다. 본인의 비평집에서 묘사한 대로, “그것들은 규정할 수 없는 움직임들로, 우리의 의식의 경계에서 매우 빠르게 미끄러져 지나간다. 그것들은 우리의 몸짓, 우리의 말, 우리가 드러내고 또 우리가 느낀다고 믿으며 정의할 수 있다고 여기는 감정들의 근원에 있다. 그것들은 내게 우리 존재의 은밀한 원천을 이루는 것처럼 보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보인다.”

 

요컨대 관건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과 사물 사이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끊임없는 움직임들, 상호작용들을 포착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투, 대화의 틈, 눈빛, 침묵, 집단적 분위기, 상투적 표현, 사소한 무시, 가족의 압박, 은근한 우월감, 관례적 언사, 진열창의 상품, 닫힌 문, 초인종, 부엌의 물소리 같은 것들이 내면에 일으키는 반응과 반작용의 작은 떨림, 이런 것들이『향성』의 진짜 사건이며,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마음의 파장 자체이고, 인물들은 반응의 장소, 곧 배경을 이룬다. 인간을 몇 가지 유형으로 범주화하는 사고에 사로트의 향성 개념은 강력한 문학적 반론을 제공한다. 고정된 틀을 비정형의 움직임이, 기질의 분류를 관계적 반응이, 명사와 형용사의 규정성을 동사와 부사의 부유성이 대체한다.

 

네 글자의 성격 유형론이 사적인 대화의 빈칸을 메울 때, 공적 영역에는 또 다른 알파벳 유형론이 등장한다. 이번에는 세 글자다. 그중 하나는 나머지 둘의 단순 교집합이므로 실상 두 글자의 대립이다. “너 T구나”의 끔찍한 단순성이 사적 관계를 납작하게 만든다면, 이 또 다른 알파벳은 정치적 인간을 앙상한 언어로 재단한다. 중립적 분석의 얼굴 뒤에 진영의 논리를 감춘 도식은 인간 이해라기보다 유형화의 충동에 가깝다. 복잡한 정치적 행위의 동기를 단 두 개의 기호로 쾌도난마 해낸 평자가 암시하는 참조는, 아마도 막스 베버의「직업으로서의 정치」로 보인다.

 

저 글의 어디에 그런 유형론이 담겨 있었을까? ‘청춘의 독서’로 남은 오래된 책을 다시 꺼내 들춰본다. 1919년 자유학생연맹의 초청으로 한 서점에서 행한 강연에서 베버는 녹봉을 받고 봉직에 종사하는 직업 정치인의 출현 조건과 현대적 정치 체제를 세세히 검토한다. 정치를 ‘위해’ 사는 사람과 정치에 ‘의해’ 사는 사람이라는 분류는 현대적 직업 정치인의 형상 안에 하나의 근본 조건으로 합일되므로, 거기서 ‘가치 지향형’과 ‘이익 지향형’이라는 대립 관계를 끌어낼 수는 없다. 신념, 원칙, 가치의 순수성을 중시하는 ‘신념윤리’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고 감당하려는 ‘책임윤리’의 대립은 더욱 아니다. 행위가 가져올 수 있는 파국적 결과에 책임지지 않은 채 의도의 순수성으로 도피할 위험이 있는 전자와, 정치적 결과에 따르는 무제한적 책임을 강조하는 후자는, 정치적 행위 안에서 서로 충돌하고 결합해야 하는 두 힘이기 때문이다. 정치가의 세 가지 자질로 열정, 책임감, 균형감을 강조하는 강연문에서 오히려 눈에 띄는 구절은 명사와 형용사로 이뤄진 유형화보다는 지속적인 운동을 강조하는 동사와 부사의 언어다.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을 동시에 갖고서 단단한 판자를 강하고도 천천히 뚫어가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첫 출간 당시『향성』의 표지에는 ‘소설’이라는 라벨링이 붙지 않았다.

 

한석현 방송대 교수·프랑스언어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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