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고민하며 행간을 이해하는 과정은
오렌지를 통째로 먹는 것과 같다.
반면 AI가 정제해 준 요약본만 소비하는 것은
오렌지주스를 마시는 것과 같다.
오렌지 네다섯 개를 한 조각씩 씹어 먹다 보면 금세 배가 부른다. 과육 속 식이섬유가 소화 속도를 늦추며 자연스러운 포만감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반면 같은 양을 주스로 마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큰 컵 한 잔을 만드는 데 서너 개 이상의 오렌지가 들어가지만, 우리는 그것을 단 몇 분 만에 마셔 버린다. 자연이 설계해 둔 ‘천천히 먹게 하는 장치’가 제거되면서,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과도하게 섭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 현상의 배경에는 인류의 오랜 진화사가 숨어 있다. 수백만 년간 굶주림과 싸워온 인간에게 고열량 식품을 과식하는 것은 생존에 유리했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달고 열량이 높은 음식을 접하면 더 먹으라는 보상 신호를 보내도록 진화했다. 문제는 현대 식품 산업이 이러한 원초적 본능을 지나치게 자극한다는 점이다. 가공식품은 우리가 좋아하는 맛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더 쉽게, 더 많이 먹도록 유도한다. 오늘날 비만이나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이 급증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진화적 미스매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영양학 분야에서는 가공되지 않은 진짜 음식을 먹자는 ‘Eat Real Food’를 강조한다. 다소 심심할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야말로 우리 몸을 지키는 최후의 안전장치다.
이러한 진화의 오작동은 비단 식탁 위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인공지능(AI)이 일상화된 오늘날, 우리의 배움 역시 이와 닮은 위험에 놓여 있다. 인간의 뇌는 에너지를 아끼도록 진화했기에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인지 활동을 본능적으로 기피한다. 반면 AI는 버튼 몇 번으로 방대한 글을 요약하고 핵심만 추려준다.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적은 노력으로 막대한 정보를 손에 쥐게 됐다.
여기서 오렌지 비유가 다시 등장한다. 직접 책을 읽고 고민하며 행간을 이해하는 과정은 오렌지를 통째로 먹는 것과 같다. 시간과 노력이 들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지식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반면 AI가 정제해준 요약본만 소비하는 것은 오렌지주스를 마시는 것과 같다. 빠르고 편리하지만, ‘씹고 소화하는 인지적 과정’이 통째로 생략돼 있기 때문이다.
요약본만 탐닉하며 스스로 사고하는 과정을 건너뛰는 학습은 우리의 지적 근육을 약화시킨다. 진정한 배움은 정보의 단순 소비가 아니라, 그것을 맥락 속에서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붙들고 씨름하며 자신의 언어로 정리할 때 비로소 생각의 힘이 길러진다. 뇌 역시 지식을 소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평생교육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정보를 주체적으로 소화해 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이다. 방송대에서의 학업이 때로는 느리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텍스트를 스스로 씹어 삼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건강한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생각하는 힘을 기른다.
달콤한 오렌지주스에만 손을 뻗기보다 가끔은 오렌지를 직접 깎아 먹는 수고로움을 즐겨보자. AI의 요약본에 의존하기 전에 스스로 읽고 사유하는 시간을 가질 때, 차근차근 쌓아 올린 배움은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가장 건강한 지적 자산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