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를 앞두고 남긴 사진에서도 같은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손이 부끄러워 내
놓을 수 없다”라는 뜻으로 뒷짐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와 방송대 정문 쪽으로 걷다 보면 금세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마로니에공원입니다.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들, 대학로를 찾은 시민과 중·고등학생들로 늘 북적입니다. 그런데 공원 한쪽을 둘러보면 양복을 입고 꼿꼿이 서 있는 한 인물의 동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동상 받침대에는 ‘김상옥 열사의 상’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동상이 세워질 당시에는 ‘김상옥 열사’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보통 ‘김상옥 의사’라고 부릅니다.
김상옥 의사는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총과 폭탄을 들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것은 아닙니다. 1889년, 서울 효제동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린 시절부터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야학에 다니며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철물점을 경영해 생활 기반을 마련한 뒤에는 국산품을 장려하고 일본 상품을 배척하는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3·1운동을 겪은 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의열단에 참여했고, 서울로 돌아와 일제의 통치기관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던 식민지 경찰의 중심 기관이었습니다. 의거 뒤 일본 경찰의 추적이 시작됐습니다. 1월 17일, 후암동 은신처가 포위되자 총격전을 벌이며 포위망을 빠져나왔고, 눈 덮인 남산을 넘어 효제동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닷새 뒤인 1월 22일 새벽, 효제동의 은신처도 발각됐습니다. 수백 명의 일본 경찰이 주변을 에워쌌습니다. 그는 여러 집의 지붕과 담을 넘나들며 약 세 시간 동안 맞섰습니다. 여러 발의 총상을 입고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으며, 마지막 탄환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서른네 살이었습니다. 정부는 1962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이러한 삶을 떠올리며 김상옥 의사 동상을 보면 더욱 인상 깊습니다. 양복을 단정히 입고 두 손을 뒤로 모은 채 서 있습니다. 거사를 앞두고 남긴 사진에서도 같은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손이 부끄러워 내놓을 수 없다”라는 뜻으로 뒷짐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동상은 거사를 앞두고 굳은 결의를 다지던 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김상옥 의사 동상은 순국 75주년을 맞은 1998년 5월 28일,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가 세웠습니다. 당시 기념사업회장은 젊은이들의 문화공간인 마로니에공원에 동상을 세워, 이곳을 찾는 청소년들이 김상옥 의사의 애국정신을 배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김상옥 의사의 출생지이자 최후의 항전 장소인 효제동과 가까운 이곳은, 많은 시민과 젊은이들이 그의 삶을 만나고 기억하는 장소가 됐습니다. 동상에서 종로5가 쪽으로 가면 ‘종로5가·효제동·김상옥 의거 터’라는 이름의 버스정류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종묘 동쪽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김상옥로’라는 이름도 붙어 있습니다. 효제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최후를 맞은 김상옥 의사의 삶이 동상, 정류장과 도로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대학 본부에 오실 일이 있거나 대학로를 지나실 때, 마로니에공원 한쪽에 있는 김상옥 의사 동상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춰보시면 어떨까요. 우리가 오가는 길과 주변 공간에도 역사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