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각성은 때로 사유가 머물 시간과 공간을 박탈한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의 지연과 불투명성은 타자의 말 앞에서
잠시 멈추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유의 계기일지도 모른다.
“언어의 장벽이 사라진다.” 실시간 자동번역이나 웨어러블 번역 장치의 발전상을 전하는 소식에서 흔히 보는 말이다. 관심이 가는 것은 기술적 성취가 주는 놀라움보다도 그 성취를 말하는 습관적 은유다. 기대 섞인 이 상투적 표현에는 아마도 두 가지 생각이 전제돼 있을 것이다. 언어의 복수태는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생각, 그리고 번역이란 언어 사이의 등가 교환이라는 생각이다.
완전 교환의 조건 혹은 자동번역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변환의 동시성, 메시지의 등가성, 그리고 교환의 투명성. 하지만 대상을 불문하고 모든 교환은 항상 부등가 교환이며, 교환은 오히려 차이가 있기에 발생한다. 안타깝게도 번역에는 서로 다른 가치를 측정하거나 표시할 수 있는 화폐, 곧 교환의 보증자가 있을 수 없다. 출발어에서 도착어로의 이행은 늘 결여와 잉여를 수반한다. 즉, 언제나 덜 옮겨지거나 더 옮겨진다.
무엇이 탈락되고, 무엇이 추가되나? 문체, 운율, 리듬, 억양, 기표의 울림, 문화적 기억, 단어에 축적된 역사…. 긴 상실의 목록에 비례하며, 다른 것이 생겨난다. 상이한 문법구조로부터 원문에는 없던 강조가 생겨나며, 말에 쌓인 역사의 다름으로부터 새로운 뉘앙스가 덧붙고, 때로는 원래의 말이 다른 언어 안에서 뜻밖의 생명을 얻기도 한다.
이는 언어의 물질성이라는 근원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하이데거가 “말이 결여된 곳에서는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언어로의 도상에서』)라는 문장을 오래 사유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말은 사물을 가리키는 순간 그 사물을 부재하게 만들고, 그 사라짐의 자리에서 말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 된다. 소리와 글자와 기억을 지닌 오브제, 뜻으로 환원되지 않는 물질적 형상. 번역이 어려운 것은 이처럼 뜻을 옮기고 난 뒤에도 여전히 뒤에 남는 말의 몸체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번역의 불완전성 혹은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번역이란 본래 비등가적임을, 그 점에서 손실의 기술이자 생성의 기술임을 말한다.
바벨 신화는 흔히 언어의 혼란과 분열을 저주로 설명하는 이야기로 읽힌다. 하나였던 말은 갈라졌고, 인간은 서로를 알아듣지 못하게 됐으며, 세계는 흩어졌다. 조지 스타이너는『바벨 이후』에서 이 신화가 함의하는 상징을 전도시킨다. “인류는 파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언어들 사이에 흩어짐으로써 생명력 있고 창조적인 상태로 보존됐다.” 바벨 이전에 존재했다고 상상되는 하나의 말, 그 원초의 언어(Ur-Sprache)는 완전한 소통의 꿈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의 질서, 하나의 이름, 하나의 세계관이 모든 차이를 덮어버리는 상태일 수 있다. 바벨 이후의 세계는 혼란의 세계이지만, 바로 그 혼란 때문에 해석과 창조가, 곧 본래적 의미의 번역이 시작된 세계이기도 하다.
스타이너는 번역을 단순한 교환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학적 운동으로 설명한다. 그 운동은 네 단계로 이뤄진다. 번역은 먼저 원문 안에 옮길 만한 의미가 있다는 ‘신뢰’에서 시작된다. 그다음으로 번역자는 원문의 내부로 들어가 의미를 붙잡고, 그것을 자기 언어 안으로 끌어 온다(‘침입’과 ‘수용’). 마지막으로 번역자는 자신이 가져온 것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해야 한다. 이는 원문의 낯섦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으면서 다른 언어 안에서 다시 살아날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일이다.
스타이너가 말하는 해석학적 운동의 네 단계는 번역이 곧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하이데거에게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스타이너에게 번역은 서로 다른 언어의 집들 사이를 오가는 이해의 운동이다. 우리는 하나의 투명한 공통어 안에 살지 않는다. 같은 언어 안에서도 저마다의 기억과 경험, 습관과 욕망, 지성과 감각이 스며든 개인어를 말한다. 언어의 다양성은 소통의 장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해가 발생하는 조건일 수 있다. 이해란 말에서 말로 건너갈 때 생기는 시차와 괴리를 넘어서려는 노력 속에서 이뤄진다. 이 노력을 ‘사유’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차이를 소거시키는 즉각적인 교환만은 아니다. 즉각성은 때로 사유가 머물 시간과 공간을 박탈한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의 지연과 불투명성은 타자의 말 앞에서 잠시 멈추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유의 계기일지도 모른다.
바벨 이전으로의 회귀는 과연 “흩어지고 오염된 말의 옥벽”으로부터의 해방일까? “산산이 부서진 탑의 잔해”로 세워진 바벨 이후의 세계에서 언어는 어긋남과 간극을 품은 각자의 집이 된다. 그러나 바로 그 간극 때문에 해석이 생기며, 타인의 말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타 언어든 타인의 언어든 우리는 그 직접성에 다가서기 위해 죽을 때까지 말을 배운다.
한석현 방송대 교수·프랑스언어문화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