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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우체국 앞에는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습니다.

“나뉘면 쓰러질 것이요 합하면 일어서리라”

 

8월 15일은 광복절입니다. 1945년 이날, 한국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가 그날을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국외에서는 여러 독립운동 세력이 활동하고 있었고, 국내에서도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며 해방과 그 이후를 준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몽양 여운형입니다. 대학본부에서 혜화동 로터리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혜화동 우체국 앞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지’라고 적힌 표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길 건너에 보이는 버스정류장의 이름에도 ‘여운형 활동 터’가 들어가 있습니다. 여운형은 어떤 인물이기에 그의 이름과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일까요?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부터 교육과 계몽 활동에 나섰고,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는 데 참여했고, 이듬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활동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3·1운동 이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된 활동에 참여했고, 이후 국내에서도 언론과 사회운동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광복 직전, 여운형의 활동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는 일본의 패망이 머지않았다고 판단하고 1944년 8월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습니다. 건국동맹은 일제에 맞서는 단체임과 동시에 해방 이후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일까지 준비하려는 조직이었습니다. 국내에서 조직망을 넓히고, 중국 옌안의 조선독립동맹과 연락을 취하며 일제 패망 이후를 대비하려 했습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이 확실하게 되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여운형을 만나 일본인들의 안전한 귀환을 위한 치안 유지에 협력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의 즉각적인 석방, 식량 확보, 정치운동에 대한 불간섭 등을 조건으로 제시했습니다. 안재홍 등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 단체는 단기간에 빠르게 확대돼 8월 말에는 전국 145개 지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광복 이후의 현실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에는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했고,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국가를 세울 것인가를 둘러싸고 여러 정치세력 사이의 갈등도 심해졌습니다. 여운형은 정치적 대립을 넘어 통일된 국가를 세우려는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한 뒤에는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습니다. 좌파와 우파가 서로의 차이를 조정하면서 함께 정부 수립의 길을 찾아보자는 시도였습니다.

 

여운형은 해방 이후 여러 차례 테러를 당했습니다. 1947년 7월 19일, 차를 타고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던 중 총격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해방을 준비하고, 통일된 국가를 세우려 했던 삶이 이곳에서 끝났습니다. 혜화동 우체국 앞에는 이런 사실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습니다. 표석에는 “나뉘면 쓰러질 것이요 합하면 일어서리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에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르는 3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복잡한 시기였습니다. 해방의 기쁨 속에서 새로운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둘러싼 여러 구상과 선택이 등장했고, 좌우의 대립과 분단도 점차 현실이 돼 갔습니다. 여운형의 삶은 바로 그 과정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습니다. 광복을 맞기 전부터 그날 이후를 준비했던 사람들의 고민, 그리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우리 사회가 겪었던 선택과 갈등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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