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학습관의 어느 날, 일본학과 나행주 교수님의 일본학 역사 특강이 한창이었습니다. 일본학과 나행주 교수님의 특강은 마치 엑스레이처럼 시대의 속살을 낱낱이 파헤쳐 주는 명강의로 언제나 학우들의 호응이 뜨겁습니다. 이날의 일본학 역사 특강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비롯한 다양한 역사·인문 특강이 열릴 때면 우리 가족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강의실을 찾곤 했습니다. 교과서 속 활자로만 접하던 딱딱한 지식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역사와 세상 이야기를 온 가족이 함께 나누는 그 시간 자체가 우리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배움의 장이었습니다.
강의실 한쪽을 조용히 채우고 있던 우리 가족의 모습이 교수님과 학우들에게도 꾀나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77세의 나이에도 식지 않는 배움의 열정을 보여주시는 시어머니부터, 50대 부부인 저와 남편, 그리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가는 중학생과 초등학생 아이들까지 3대가 나란히 앉아 교수님의 말씀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거든요. 연세 드신 어머님은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필기에 열중하고, 아이들은 신기한 듯 눈을 반짝이며 강의에 몰입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배움이란 책 속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우리 삶의 터전 속에서 서로를 더 따뜻하게
품어 안게 만드는 소중한 나침반이 돼줍니다.
오늘 하루를 조금 더 의미 있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마법 같은 힘,
그것이 바로 우리 가족이 함께 걸어가는
배움의 길이 전해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50대의 책가방, 그리고 눈부신 인연들
생각해 보면 참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50대에 시작하는 공부가 설레기도 하고 두려웠지만, 아들들을 좀 더 잘 키워보고 싶고 무엇보다 내 삶을 가치 있게 살고 싶어서 입학했습니다. 청소년교육복지상담학과 학생으로서 가사와 학업을 병행하는 것도 벅찬데, 의왕시 노인복지관 계약직 일에 청소년 쉼터 자원봉사, 문화의 집 고립·은둔 청소년 멘토링 활동, 진로지원센터 학부모 모니터링단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죠.
하지만 이렇게 바쁜 나날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그 길 위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덕분이었습니다.
막상 입학해 보니 70이 넘어서 시작한 분들도 많고, 한 번 시작한 분들은 과를 바꿔가며 계속 공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방송대에서 만난 분들은 대부분 남다른 가치관을 갖고 계십니다. 그냥 살기보다는, 학위나 자격증을 따기 위함이 아니라 그야말로 공부가 좋아서, 멈춰 있는 것이 싫어서 자신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배우는 사람’이 되어가는 우리 가족
주변에서 “그 바쁜 와중에 왜 그렇게 고생스럽게 사냐”라고 묻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배움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멋진 학위 하나를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년에 이 학과를 졸업하더라도, 앞으로 건강과 시력이 허락하는 한 새로운 학과에 등록해 꾸준히 공부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해 가는 그 과정 자체가 멈춰 있던 제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 곁에는 언제나 든든한 남편이 함께해 주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인 저와 함께 강의실을 찾습니다. 아이들의 교육을 흔히 엄마의 몫으로만 여기기 쉬운 요즘이지만, 부부가 나란히 앉아 배우는 모습 그 자체로 아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부터 아이들이 배움의 자리를 두 손 들고 반겼던 것은 아닙니다. 중학생인 큰아들 회수도 처음에는 거실 소파에서 일어나기 귀찮아하며 마지못해 엉덩이를 떼는 날이 많았죠. 때로는 억지로 끌려오듯 투덜대며 따라나설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번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고 나면 아이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귀찮았지만, 막상 와서 들어보면 내 진로나 미래를 고민하는 데 진짜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생겨서 이제는 기꺼이 참석한다”라는 아이의 의젓한 고백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부모와 함께 강의실을 찾고 세상 다양한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마주하는 그 시간은, 학교 교과서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살아있는 배움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온 가족이 함께 ‘배우는 사람이 되는 경험’이 아이들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더 단단한 내일을 만들어갈 거라 굳게 믿습니다.
우리 가족 배움의 최고 주인공, 77세 시어머니
우리 가족의 배움에서 가장 극적인(?) 주인공을 꼽으라면 단연 시어머니입니다. 젊은 날 교육자의 꿈을 품으셨던 어머님은 77세라는 나이에 그 꿈을 다시 꺼내 드셨습니다. 노인복지관 노인대학을 4년간 수료하시며 배움에 대한 갈증을 멋지게 풀고 계시죠.
사실 처음부터 제 공부를 반기셨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방송대에 처음 입학했을 때만 해도 “가사도 돌봐야 하는데 굳이 왜 그 고생을 하냐”라며 적잖이 걱정하시고 못마땅해하셨어요. 하지만 어머님 스스로 복지관에서 배움의 즐거움을 직접 겪어보신 후로 180도 달라지셨습니다. 이제는 가족 중 누구보다 제 공부를 열정적으로 응원해 주시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셨죠. 며느리의 공부를 걱정하던 시어머니가 이제는 손자들과 나란히 앉아 강의를 즐기시는 모습 생각할수록 미소가 번집니다.
강의를 진행하시던 나행주 교수님께서는 “연수(둘째 아들·초5) 학생은 전국 최연소 청강생일 것”이라며 유쾌한 농담과 함께 “3대가 함께 청강하는 모습이 강좌에 큰 활력을 준다. 매번 빠지지 않고 집중하는 걸 보니 장래가 유망하다”라는 따뜻한 덕담을 건네주셔서 강의실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습니다.
같은 교실에서 새로운 꿈 다지는 다섯 식구
우리 가족은 강의실에서 서로에게 가장 좋은 자극이 돼주곤 합니다. 77세의 할머니가 새로운 지식에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반짝이며 배움을 즐기시면, 50대 부부인 저와 남편은 일과 학업을 악착같이 병행하며 지치지 않는 열정을 다집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은 그 모든 과정을 눈에 담으며 자연스럽게 배움의 가치를 체득해 나갑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그날 들었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식탁 위 풍성한 대화거리가 됩니다. 살아온 세월도, 관심사도, 저마다의 시선도 다른 세대가 같은 강의실에서 같은 이야기를 듣고 각자의 생각을 나누다 보면, 서로의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보이지 않던 마음의 결까지 헤아리게 됩니다.
우리 가족에게 공부란 거창한 성공을 거두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매일의 치열한 삶 속에서 일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가족과 함께 일상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깨우치며, 그것을 다시 삶으로 가져오는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입니다. 배움이란 책 속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우리 삶의 터전 속에서 서로를 더 따뜻하게 품어 안게 만드는 소중한 나침반이 돼줍니다.
77세 할머니, 55세 엄마, 54세 아빠, 그리고 두 명의 아이. 살아온 시간도, 앞으로 살아갈 시간도 저마다 다른 우리 다섯 식구가 한 교실에 모여 똑같은 ‘학생’이 되는 시간은 생각할수록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줍니다. 나이의 경계도, 세대의 차도 없이 오롯이 배움 앞에서는 하나가 되는 그 순간들 속에서, 우리의 이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은 때로는 가족을 더욱 단단하게 묶어주는 든든한 동아줄이 돼줍니다.
오늘 하루를 조금 더 의미 있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마법 같은 힘, 그것이 바로 우리 가족이 함께 걸어가는 배움의 길이 전해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