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4·19와 『광장』

최인훈 작가의 생전의 모습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아마, 마카오에서, 다른 데로 가버린 모양이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소설 『광장』(1960)은 작가가 10여 차례 개고(改稿)한 작품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가리키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문학사적 성좌가 됐다.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작가 최인훈은 2018년 7월 23일 서울에서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타계를 기억하는 글들 뒤편에 <역사비평> 2019년 봄호(126호)에 실린 생전의 마지막 인터뷰(정병준·최인훈, 「『광장』과 4·19의 연관성―“무엇을 쓰는지, 의미를 알지 못했다. 쓰고 싶었을 뿐이다”」)를 추가해야 할 것 같다.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의 저자인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한국사)가 2017년 7월 15일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작가의 자택을 찾아 진행한 인터뷰였다.
정병준 교수는 이날의 인터뷰를 이렇게 말한다. “최인훈 선생은 역사학자와의 대담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필자 역시 소설가와의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소설가와 역사가의 흥미로운 대담은 2시 간 남짓 진행되었고, 『광장』과 한국 현대사를 둘러싼 자유로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당시 최인훈 선생은 칭병하며 기조강연을 거부했지만, 실제 병중은 아니었다. 누구도 당시 이 인터뷰가 선생의 마지막 생전 인터뷰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소설과 역사적 사실

정 교수는 이 인터뷰를 바탕으로 일종의 인터뷰 해설이라 할 수 있는 「최인훈의 『광장』과 중립국행 76인의 포로」를 썼다. <역사비평> 봄호는 이렇게 인터뷰와 해설을 동시에 게재함으로써, 최인훈의 『광장』과 4·19를 ‘재기억’했다. 정 교수의 작업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사실에 근거해서 사건의 실체와 의미에 접근하는 역사학자 특유의 눈썰미다. 그가 주목한 것은 ‘작가의 개작 혹은 개작 과정’이 아닌 ‘중립국행 포로 76인’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다.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 76인이라는 ‘팩트’와, 『광장』 이후 이들이 한국 사회에 어떻게 수용되는지를 정리한 부분은 분명 돋보인다.
문학사에서 ‘개작(改作)’은 드문 일이 아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1936년 발표했던 『설국』을 상당 기간 고쳐쓰는 데 주력했다. 그의 경우 미세한 언어의 떨림까지 포착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한국 문학사에서 최인훈의 경우는, 관념형 소설인 『광장』의 주요 장치들을 고치고 또 고친 사례로 봐야 한다.
1960년 11월 <새벽>에 발표했을 때, 『광장』은 200자 원고지 600장 분량의 중편이었다. 이듬해 정향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할 때, 최인훈은 좀더 수정 가필해 원고지 800장 분량의 작품으로 고쳤다. 1967년 신구문화사 간행 ‘현대한국문학전집’에 작품을 실으면서 작가는 중요 부분을 교정했으며, 1973년 민음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할 때는, 원래 작품의 한자어를 대부분 한글로 바꾸었고, 중요한 메타포인 ‘갈매기’ 장면도 수정했다. 197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최인훈전집’을 간행할 때는, 지금까지의 ‘개작’과는 다른 대대적인 교정을 보탰다. 2010년에도 194쪽 분량 가운데 무려 14쪽 가량을 빼고 이를 대체하는 부분을 새로 썼다. 『광장』 출간 55주년을 맞이해 한 차례 더 수정작업이 있었다. 평단은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시대에 동화된 별개의 작품으로 보지만 유독 최인훈은 ‘개작’에 공을 들였던 것이다.
역사학자의 접근은 문학연구자 혹은 비평가의 작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그는 최인훈의 글 「소설 『광장』을 고쳐 쓴 까닭」(『최인훈전집 12. 문학과 이데올로기』, 문학과지성사, 1994)을 참조하고, 2014년 ‘가장 최신판’ 『광장』에 붙은 7개의 머리말·서문을 참조해, “실제로 최인훈이 수정한 것은 11회를 상회한다”고 각주를 붙이면서, “역사적 사실 위에서 제한된 자료를 통해 이 정도의 소설을 구성했지만, 대체적으로 사실상에 큰 착오가 없는 소설을 썼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 집필 당시 자료의 한계는 이후 최인훈이 10여 차례에 걸쳐 『광장』을 개고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하는 걸 빼놓지 않았다.
정병준 교수의 역사학자로서의 안목이 발휘된 부분은 이 소설 『광장』을 좀더 내밀하게 4·19와 연결시켜낸 대목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소설은 극단의 체제가 종용하는 강제에 순응하지 않는 지식인의 이성적 고뇌, 의지적 선택, 운명의 자기 결정권·자기주도성, 자유의지를 부각시켰다. 24세 지식인 청년이 가질 법한 사랑과 이데올로기의 고뇌가 담긴 이 소설은 작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했으나 극단적인 냉전 체제의 너머를 상상할 수 있게 함으로써 화제작·문제작이 되었다. 역시 4·19라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시대정신이 이 소설의 정신적 동력이었다.” 그렇더라도 ‘4·19라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시대정신이 이 소설의 정신적 동력’이라고 평하는 부분은, 기존의 문학연구자들의 평가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가 이러한 평가 위에서 작중 주인공 ‘이명준’의 자살을 설명하는 ‘다른 방식’을 동원했다는 것인데, 그 내용이 지극히 일면적이서 공감하기 어렵다.


제3의 선택과 소설의 운명

정 교수는 최인훈이 서울대를 다니던 시절의 대학문화에 일본 제국대학의 유산이 남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특히 “일고생으로 도치기현(?木?) 닛코시(日光市) 게곤노타키(華嚴瀧)에서 투신자살한 후지무라 미사오(藤村操, 1886~1903)가 남긴 「바위 끝의 생각(巖頭之感)」이라는 절명시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설명하면서, 최인훈 인터뷰 내용에 근거해 추론을 전개했다.
그러나 “후지무라의 자살은 그의 영어교사로서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된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그의 1년 선배로 이와나미 출판사의 창립자가 된 이와나미 시게오(岩波茂雄)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후 수백 명이 게곤폭포에서 모방 자살을 할 정도로 이 폭포는 자살 명소가 되었다.”라는 설명과, “『광장』의 이명준이 자살을 선택한 것은 막다른 골목(cul-de-sac)에 도달한 주인공의 현실적·심리적 좌절, 강박 때문이었거나 작가적 선택이었겠지만, 다른 한편 후지무라 미사오에 탐닉했던 염세적(厭世的) 대학문화의 유산이었을 수도 있겠다.”라고 설명한 대목에는 어떤 논리적 접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 교수가 조심스럽게 ‘염세적 대학문화의 유산이었을 수도 있겠다’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바로 이렇게 발언하는 순간, 『광장』의 이명준이 선택한 죽음은 하나의 ‘풍문’과 같은, 서구 자유주의 교양을 세례 받은 미성숙한 지성인의 종생기에서 멈추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 혹은 독법은, 어째서 이명준이 남도 북도 아닌 제3지대를 선택해야 했는가라는 역사철학적 질문, 소설의 운명을 만들어내는 소설사적 질문을 왜소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작품=현실’이라는 도식은 언어학자 소쉬르가 언어의 자의성(arbitrary)을 지적한 이래 여지없이 깼으며, 이제 작품은 텍스트(text)가 되어 4·19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각인된, 더 열린 질문으로 이어진다. 1960년 4·19의 함성에 자극받아 탄생한 소설 『광장』은 이명준이라는 문제적 인간을 남도 북도, 그리고 인도(제3국)도 아닌, ‘생의 결단적 마감’으로 이끌어가면서, 그의 ‘죽음 이후’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염세적 대학문화의 유산이라면, 이 죽음은 ‘박제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4·19는, 『광장』은, 그리고 이명준의 죽음은, 지금도 우리에게 되묻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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