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끝없이 이어지는 세월을 삼백예순다섯 날마다 끊어서, 느슨해진 마음을 조이고 새로운 각오를 다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옛사람들의 지혜가 새삼 고마워지는 정초이다. 물론 새로운 결심을 한다고 해서 지키는 경우는 많지 않다. 사흘이 멀다 하고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다잡아 보지만 역시 작심삼일로 끝나는 일이 많다 보니 스스로에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올해는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했다.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새해의 태양은 왠지 설렌다.
해가 바뀌고 보니 한동안 소식이 뜸한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이다. 별일 없어?”
“그래, 고맙네. 자네도 별일 없지?”,
“덕분에 잘 지내. 며칠 내로 만나 밥 한번 먹자.”
“그러자, 술도 한잔 해야지.”
전화를 끊고 나서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그냥 서로 별일 없는지 묻고 밥을 같이 먹자는 말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이게 무슨 조화인가.
‘별일 없다’는 말은 ‘특별히 좋거나 나쁜 일 없이 그저 그렇다’는 뜻 같아서 젊었을 때는 왠지 답답하고 심심하고 소극적인 어감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지금 젊은이들 역시 그렇게 느낄지도 모른다. 별일 없기보다는 별일 있기를 바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하 수상(殊狀)해서인지 아니면 나이 때문인지 이 평범한 한마디가 코끝이 찡할 정도로 고맙고 미덥고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나고 보면 이루어 놓은 일은 없는데 날마다 바쁘고 이런저런 일에 치이다 보니, 별일 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면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래서 요즘은 잠자리에 들 때면 탈 없이 하루를 보낸 게 고마워 절로 감사기도가 나온다.
‘밥 한번 먹자’도 그렇다. 한국인들은 이 말을 그냥 인사치레로 할 뿐 실제로 밥을 같이 먹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외국인이 이제나저제나 연락이 올까 기다리다가 끝내 소식이 없자 속았다 싶어 화가 나더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오죽했으면 한국인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 중에서 1위를 차지할까. 그러나 나는 ‘밥 한번 먹자’는 말을 인사치레로 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만나 밥을 같이 먹고 싶을 때 그렇게 말한다. 아마 며칠 후면 친구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락해서 약속을 정할 것이다. 마음 맞는 사람과 같이 밥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가볍게 술을 한잔 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그 장면을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나면서 괜스레 미리 즐거워진다.
이경수 본교 교수·일본학과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는 고독한 단어도 있지만 그래도 밥은 누군가와 같이 먹는 게 좋겠다. 그 누군가가 사랑과 우정으로 맺어진 관계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밥 한번 먹자’가 마음에도 없는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로 따스한 김이 오르는 밥을 먹으면서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으로 이어졌으면 한다.
지금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가장 귀한 인연으로 여기며, 별일 없는지 자주 안부를 묻고 밥 한번 먹자는 말도 많이 하려고 한다. 누가 밥 한번 먹자고 하면 인사치레려니 흘려버리지 않고 내가 먼저 밥을 사겠다고 연락해야겠다. 한정된 시간에 머무르는 우리의 삶에 ‘별일 없지’와 ‘밥 한번 먹자’처럼 미덥고 정겨운 말이 어디 그리 많으랴.
가족도 이웃도 친구도 동료도 대한민국도 다 별일 없고, 밥을 같이 먹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0좋아요 URL복사 공유
현재 댓글 1
댓글쓰기
0/300
  • huma***
    아주 좋은글입니다.
    2020-01-07 10:25:06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