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일년을 시작하는 조금 특별한 방법

연말연시에 서점에서 가장 핫한 장르는 ‘다이어리’가 분명하다. 한 해를 준비하기 위해 책을 살펴보러 가지만, 결국 마지막에 내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다이어리다. 새 다이어리를 펴고, 한 해를 관통할 다짐을 적을 때 두근거린 기억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올 한 해가 어떻게 펼쳐질지 그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본 경험 말이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연말쯤 다이어리를 다시 펼치면, 다이어리의 앞쪽만 빼곡하다. 뒤로 넘기다 보면 맥락을 잃은 단어들만 덩그러니 나뒹군다. 왜 이런 걸까? 어떻게 하면 빼곡한 다이어리와 함께 한 해를 마감할 수 있을까.

 

1800일의 기록… 일상의 변화 이끌다
느닷없이 내 자랑을 하자면 나는 ‘에버노트’라는 디지털 메모 도구에 약 1800일 간 기록을 해 왔다. 건너뛰는 날도 있었지만, 5년 간 가장 잘 지킨 습관이라 할 수 있다. 한 해, 365일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노트다. 아무래도 디지털 도구로 적을 때는 디지털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다. 기기 간 동기화, 빠른 기록, 검색이 가능하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데, 이런 속성을 가진 내용은 대체로 디지털에 기록하는 편이다. 다시 말해, 하루의 이벤트, 기억하고 싶은 정보, 중요한 대화, 새로 접한 지식 등을 에버노트에 남긴다.
이렇게 1800일을 기록해 오다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은 적이 있다. 그저 성실하게 매일 매일 정리하고 싶었는데, 기록이 쌓이다 보니 나만의 분류체계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언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한 해 동안 풍요로운 대화를 나눈 날’을 따로 모아서 보고 싶다면 뾰족한 수가 없다. 1800개의 데이터를 일일이 클릭해봐야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정보가 일정량 쌓이면, 마침내 ‘재분류’의 필요성이 생긴다.
“언제 뭘 했다”는 수준의 정보 말고, 더 가치 있는 내용을 도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3년쯤 전부터 ‘태그tag’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새로운 경험을 했던 날, 무언가를 처음으로 시작한 날, 속 깊은 대화를 나눈 날, 감사한 날, 커다란 성취가 있었던 날’에는 각각 태그를 붙인다. 이렇게 태그를 붙이게 되면, 해당 태그를 중심으로 1800개의 데이터를 새롭게 재분류할 수 있다. 즉,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한 해를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주제를 ‘태그’로 관리
예를 들어보자. 풍성하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눈 날에는 짤막하게 어떤 대화를 했는지 기록하고 해당 메모에 ‘.conversation’태그를 붙여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일 수도 있고, 책을 읽으며 대화를 나눈 듯한 기분일 때도 붙여놓는다. 2019년엔 55개가 검색된다. 2018년에 45개가 검색되는 것을 볼 때, 2019년에는 좀 더 좋은 대화를 많이 나누려고 애쓴 것이다. 정성적으로 남긴 기록이 정량적으로 환산이 가능해지면, 다음 한 해를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구체적인 의욕을 만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에버노트가 서버를 폐쇄하고, 회사가 문을 닫는다고 하면 내가 가장 먼저 할 것은 손으로 내 인생의 주제를 정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새롭게 내 인생의 주제를 태그로 나누어 보고, 그 태그가 어떻게 내 삶에 녹아들 수 있는지 고민할 것이다. ‘기록을 위한 기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록을 통해서 삶의 지향을 스스로 명확하게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기록’이라는 보조 장치 없이 그러한 삶의 지향을 따르는 게 어렵기 때문에 기록하는 것이다.
자, 이제 자랑을 정리해보자. 1800일의 기록이 없어도 괜찮다. 다만,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전에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내 인생의 주제는 무엇이었고,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가를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어딘가에 흩어져 있어서 정리하는 일이 번거롭겠지만, ‘나는 2019년을 어떻게 보냈던가’에 대해서 역으로 추적해보자. 그리고 거기에서 잠시 잊고 있던 의욕, 다짐, 결심과 시도와 실행, 그리고 여러 만남과 작은 깨달음을 정리해보자. 뒤로 돌아 천천히 걷다 보면, 그로 인해 다음 한 해를 살아낼 주제를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될 것이다. 다행인 점은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설 명절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다. 한 해를 내다보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자. 사실, 이것은 나만의 주장은 아니다.

과거와 미래 잇는 ‘기록’의 역할
‘야누스 효과(Janus Effect)’라는 것이 있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의 오마르 A. 엘 사위(Omar A. El Sawy) 교수가 이름 붙인 ‘야누스 효과’는 두 얼굴을 가진 로마의 신 ‘야누스’에서 왔는데, ‘야누스’는 라틴어로 ‘시작’을 의미한다. 야누스 효과란 미래를 내다보는 시간의 길이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가리킨다. 사위 교수는 기업의 CEO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연구했다. 한 그룹에게는 먼저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생각해보게 한 뒤에,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생각해보라고 요청했다. 다른 그룹에게는 거꾸로, ‘과거에 일어난 일’을 먼저 되돌아보게 하고, 그 다음에 ‘미래의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라고 요청했다.
『회사 말고 내 콘텐츠』,『생산적인 생각습관』,『에버노트 생각서랍 만들기』를 썼으며, ‘에버노트 커뮤니티 리더(Evernote Community Leader)’로 기록의 가치와 디지털 기록관리 등의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다.  두 그룹은 어떤 차이를 보였을까? 두 그룹 모두 과거로 약 20년 정도를 거슬러 올라갔다는 점은 비슷했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시간의 길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과거를 먼저 살펴본 그룹이 미래를 훨씬 더 멀리 내다봤던 것이다. 해가 바뀌어 숫자가 바뀐다고 해서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연장선에 살고 있는 것이므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을 ‘시작’으로 삼아야 한다. 사위 교수의 연구 결과 역시 이를 반증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서 나의 미래를 훨씬 풍부하게 상상할 수 있다. 사위 교수의 연구 결과에 한 숟가락 얹어보자면,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하는 일에 ‘기록’을 더해보자. 미래를 그려보는 일과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하나의 선 위에 올려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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