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마로니에]

책 읽을 시간이 없는 분들에게

비급고전이 패키지 관광여행이었다면,

비급고전을 본 시청자들은 이제

가이드 없이 자유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2019년, 새해가 시작되고 얼마 후 OUN 신성철 PD로부터 전화가 왔다. 개편 시즌이었으니 당연 새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일거라고 짐작했지만 그것이 책 프로그램일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이것이 생각보다 만만한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던터라 살짝 망설였다. 하지만 신 PD는 간곡했다. 외골수에 반골기질도 갖춘 그는 책의 가치나 존엄성을 알리는 목적이 아니라 이까짓 책이란 거 읽지 않아도 된다(?)는 역설의 마인드로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싶어 했다.
2018년 잡코리아와 알바몬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2030 성인남녀의 1년 평균 독서량은 13.7권. 심지어 10명 중 1명은 1년간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조사됐다. 그래서일까 찬밥신세가 된 출판시장에 새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날이 전자책 시장이 영역을 넓혀갔고, 읽지 않으면 들려주겠다는 마케팅으로 낭독해주는 책도 등장하고 있었다. 나는 책이 갖는 이 질긴 생명력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직 시도해 볼 것이 더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을 좋아했다. 그래서 제작진은 의기투합해 아이디어를 모으고 새로운 포맷을 구상하며 출연자 선정 등 기획안을 준비해 갔다. 하지만 기획안 통과는 자꾸 지체됐다.
어떤 사람은 걱정했고 또 어떤 사람은 우려했다. 책 프로그램이라니? 시대착오적이지 않냐고? 인터넷 세상에서 영화의 스포일러처럼 책의 서사가 요약본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것도 왜 하필 고루한 고전을 굳이 방송으로 만드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작진은 누구에게나 고여 있을 ‘읽고자 하는 욕망’ 그 순정한 에너지에 불을 지피고 싶었다. 그때 마침 표류중인 우리의 손을 잡아 준 것은 ‘우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현대 명저 106선’을 기획중이던 방송대 학보 <KNOU위클리>였다. 우리는 위클리팀과의 콜라보로 드디어 순항하기 시작했다.
프로그램 제목은 ‘비급고전’. 한자 ‘비급’은 ‘가장 소중히 보존되는 책’이라는 뜻을 담고 있지만, 제작진은 ‘삐끕(B급)감성’을 프로그램에 담고 싶었다. 진중하고 유용성을 강조하는 독서가 아닌 어쩌다 걸려든 한 줄, 혹은 문장 하나에 출연자가 자기만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거나 독특한 시선을 전달하는 토크콘셉트이길 바랐다. 러닝타임은 지루하지 않도록 짧게, 출연자는 꽃중년 오빠콘셉트로, 자막은 최대한 현대미술적 느낌이 나도록 큰 그래픽으로 배경을 대신하기로 했다. 책에 항상 후하기만 한 이권우 선생의 진행은 매끄러웠고 귀에 쏙쏙 꽂히는 요약은 감미로웠다. 철학적 사유를 현재의 현상에 빗대어 교회오빠처럼 젠틀하게 말하는 진태원 선생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명랑함과 유머로 오랜 신화의 세계로부터 이야기의 우물을 퍼올리는 안재원 선생의 화법은 놀라웠다. 하지만 제작진은 출연자들께 무리한 요구를 계속 했다. 더 쉽게 말씀해 달라고 더 재밌게 말씀해 달라고. 
책 읽을 시간이 없는 분들에게 비급고전이 패키지 관광여행이었다면, 비급고전을 본 시청자들은 이제 가이드 없이 자유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중요한 건 당장 여행을 망쳤더라도 언젠가 다시 여행길에 오르듯, 우리 시청자 역시 비급고전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책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 않을까? 그 이유는 아무리 별 볼일 없는 것도 주워 담는 순간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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