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김옥렬의 미술로 읽는 세계사

리베라의 작품은 피카소, 브라크, 피카비아, 세잔느 그리고 반 고흐의 작품과 더불어 뉴욕미술의 중심부에서 강렬한 시각적 웅변으로 멕시코 벽화주의를 선보였다.  멕시코 벽화의 역사적 배경에는 스페인의 지배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스페인은 300년 동안 멕시코를 식민통치하면서 언어와 사상을 통제했다. 스페인은 식민통치를 통해 긴 시간 정치와 종교적 세력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자원과 문화적 약탈로 부를 축적했다. 스페인의 식민통치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저항정신을 일깨웠다. 가톨릭 사제 코스티야(Miguel Hidalgo y Costilla, 1753~1811)를 통해 민중의 저항의식이 싹트면서 1810년 멕시코는 독립전쟁에 돌입한다. 이 전쟁은 1821년 8월 24일 코르도바조약을 체결하면서 종결됐다. 그러나 독립한 멕시코 사회는 미숙한 행정과 자본력의 부족으로 끊임없이 농민봉기와 정치적 격변을 겪어야만 했다. 스페인에서 독립한 뒤 멕시코는 100여 년간 무려 60여 차례나 정권이 바뀌는 혼돈의 시대였다. 특히 1876년 정권을 잡은 디아스(Porfirio Diaz)는 30여 년이 넘는 장기 독재를 했는데, 이때 국민 대다수가 빈곤 계층으로 전락하면서 멕시코 혁명(1910년 멕시코에서 장기 집권에 대항해 저항하면서 시작된 무장투쟁)이 일어났다. 이후 내전이 계속되다가 1920년대에 살리도(1880~1928) 정부에 들어서 민족문화를 부흥시키고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일어났는데, 그중 하나가 벽화운동이었다.멕시코 벽화운동의 의미멕시코의 벽화운동은 문학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것으로 1911년에 발생해 참담한 투쟁을 보여준 혁명의 소산이었다. 무수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독재의 잔재를 청산했으며, 폭넓은 농업 개혁으로 멕시코 사회를 변혁시켰다. 이러한 격변 속에서 이룬 예술 활동은 멕시코뿐만이 아니라 중남미(라틴 아메리카)의 미술과 문학 간의 연관성 속에서 보다 강한 결속력을 제공했다. 이 새로운 미술운동은 1920년대 10년 동안 정치적인 투쟁과 연결돼 미술사적인 사건으로 자리잡았다. 1922년 상파울로에서 ‘모던아트 세미나(Modern Art Week)’가 열렸는데, 이 세미나는 당시의 고립된 미술계가 전위문학과 시각예술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당시 멕시코 국민의 높은 문맹률을 감안한다면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해서 매우 효과적인 교육 방법은 벽화였을 것이다. 교육부 장관이었던 호세 바스콘셀로스(Jose Vasconcelos Calderon, 1882~1959)는 국립궁전과 학교 등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려 민족의식을 고취하도록 했고, 벽화운동 그룹은 아즈텍과 마야 문명 등 고대문명에서부터 식민지 시대의 아픔, 멕시코의 혁명과 역사를 벽화로 그렸다(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라틴 아메리카미술의 배경」, 『제3세계의 미술문화』, 윤범모 편저, 과학과 사상, 1990, 참조).새로운 멕시코에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멕시코 벽화의 대표적인 화가는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와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 1883~1949), 그리고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1896~1974)였다. 이 화가들의 열망은 일반 대중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멕시코의 민족의식이 담긴 새로운 양식을 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화가들의 열망이 투영된 새로운 벽화운동은 당시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식민통치와의 단절을 통해 멕시코의 전통과 미래를 연결하는 ‘벽화주의(Muralism)’라는 유산을 낳았다. 어린 시절 미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리베라는 10대에 멕시코의 농촌마을을 구석구석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러한 청년기의 경험은 원주민과 마을의 교회 그리고 전통문화의 표정을 익힐 수 있는 기회였다. 리베라는 주지사의 후원으로 1907년 스페인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아카데미(San Fernando Academy of Fine Arts)에 들어가서 스페인미술 교육을 받고, 또 거장 벨라스케스와 엘 그레코, 고야의 작품을 보면서 미술이 주는 강렬한 에너지를 체험했다. 이후 1911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신인상주의부터 입체주의에 이르는 미술운동에 가담해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또한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모인 화가들과의 교류는 청년 리베라가 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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