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중국으로 가는 옛길 ⑦

 연행노정의 중절 구간인 심양에서 산해관까지는 병자호란에 대한 기억과 비분감, 노정의 고단함이 심했던 현장이었다면, 산해관에서 연경까지의 종절 구간은 중원문화의 핵심공간인 연경으로 간다는 기대감이 고조되는 공간이었죠. 주요 여정은 산해관→심하역→무령현→영평부→칠가령→풍윤현→옥전현→계주→삼하현→통주→연경(북경) 입니다. 산해관 관문인 천하제일관을 통해 조선 사신단은 북경을 오갔다. 이곳은 조선 지식인들과 사행단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산해관 열고 중화(中華)의 세계로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화이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문명(중화)과 비문명(오랑캐)을 구분하는 화이의 기준을 만리장성으로 삼았습니다. 발해의 노룡두에서 시작되는 만리장성은 산해관 각산장성을 거쳐 연산 산맥을 따라 북경 외곽을 넘고 서쪽 사막의 가욕관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성벽입니다. 산해관은 바로 만리장성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그래서 산해관의 안을 관내(關內), 밖을 관외(關外)라 불렀습니다. 이 관문을 들어서야 ‘중화(中華)의 세계, 즉 문명(文明)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관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크기를 모르고,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모르며, 산해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과 높음을 모를 것이다.” - 박지원, 『열하일기』,「일신수필-장대기」에서 연행 사신들에게 산해관은 중국의 규모와 제도를 짐작할 수 있는 상징적인 건축물이었고, 관념 속에 자리 잡은 문명의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명·청 교체기 막바지에 청에 종군한 소현세자는 명장 오삼계에 의해 산해관이 열리고 청군이 무혈 입성하는 현장에 동행함으로써 조선이 그토록 의지하던 명(明)의 몰락을 직접 목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산해관 관문인 천하제일관은 천하의 장관이었고, 발해만에서 시작되는 만리장성의 노룡두와 장대인 징해루에는 역대 황제와 시인 묵객들이 지은 시판(詩板)이 곳곳에 박혀있어 조선 지식인들과 사행단의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사행단의 노룡두 방문은 사행 단원 중 한 화가가 그린 연행도에도 전합니다. 김창업(1658~1722)이 각산 장성의 각산사를 찾은 내력이 지방지인 『임유현지』(1878년)에 「유각산사기」로 전하기도 하고, 홍대용 등 후대의 많은 조선 지식인들 역시 각산사를 즐겨 찾았습니다.사행단 숙소는 서학년과 곡응태의 집조선 사행단이 묵었던 무령현은 춘추시대 문인 한유(768~824)의 사당과 문필봉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의 사행단 숙소는 서학년의 집을 이용했습니다. 인근의 풍윤현에서는 곡응태 집에서 숙박했는데, 이들의 후예들은 대대로 문상이 되어 세거했습니다. 조선 사행들이 중국에서 골동과 서책 구입에 집착했던 것을 감안하면, 숙박처를 삼은 이유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이 조·청 문인들의 교류 공간으로 활용되는 또 다른 이유는 ‘여정의 동일한 반복’을 들 수 있습니다. 1728년 삼절연공사의 정사로 무령현을 지나던 윤순(1680~1741)이 무령현의 진사 출신인 서학년의 정성스러운 환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조선에 서학년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후 연행 사신들이 무령현에서 서학년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같은 여정을 오가는 사신들은 연도의 명소를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관례가 된 셈입니다. 현재 무령현의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서학년의 옛집이 있었다던 성 남서쪽 거리는 이미 도시 재개발로 모두 철거가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역사의 미세한 연결고리들이 사라지는 현장입니다. 연행노정의 필답지, 백이숙제 묘 사행의 삼사를 비롯하여 조선 지식인들이 노정에서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공간들이 있었습니다. 영평성 노룡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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