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목우회가 주최한 제 44회 목우공모미술대전 서양화부 입선 작품「진실」(160×125㎝ 유화). 이 동문이 방송대에 선물한 이 작품은 현재 서울지역대학 북카페에 전시돼 있다.
어려웠던 유년 시절 부모님은 늘 생업에 바쁘셨고 일찍부터 외로움 속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나를 달래주고 견디게 해준 놀이는 어디든 여백에 만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상상 속에서 스토리를 만들고 부족한 정서적 욕구들을 낙서 같은 만화를 통해 해소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막연히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이 생겼지만 그냥 희망사항인 꿈일 뿐이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지만 어린 시절 간직했던 그 소망은 늘 가슴 한 모퉁이 옛 연인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것처럼 아련한 아쉬움으로 간직되어 있었다. 불혹이 되어서도 여전히 생활은 녹록치 않았지만 손을 놓고 마냥 시간만 흐르게 놔 둘 수만은 없었다. 작은 회사에 근무하며 박봉의 급여로 렛슨비와 물감 등 재료비를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기쁨에 퇴근 후 피곤에 쪄든 몸을 이끌고도 무엇에 홀린 듯 그림 공부를 다녔다.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야외 스케치를 다니며 실력을 쌓았고 산야의 아름다운 풍경을 캔버스에 담는 일은 참으로 삶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행복하고 진실한 순간이었다. 여러 크고 작은 미술전에서 입선을 하고 나의 도전과 성취는 또 다른 도전으로 이어주는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마음의 창고는 점점 비어만 갔다. 창고가 비어 꺼내 쓸 재료가 부족하다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위기의식을 느껴 지천명의 나이에 방송대에서 다시 창고를 그득하게 만들 수 있었다. 방송대는 지식을 쌓게 해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텃밭이 되었다. 아무리 읽고 외워도 돌아서면 하얘지는 머릿속일지라도 지향하는 마음의 방향을 잃지 않는다면 이루지 못할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진실을 선물로 받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무엇으로라도 이 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공부는 내 인생의 창고를 반짝이는 보석들로 가득 채워주었으며 삶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로움으로 눈을 뜨게 해주었다.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내가 분신처럼 여겼던 소중한 작품을 선물하기로 결정했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장터에 가면 장마당 모퉁이에는 항상 뻥튀기 아저씨가 지리를 틀고 있었다. 덕분에 뻥!!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장터 가득 퍼지곤 했다. 아저씨 주위에 둘러앉은 꼬맹이들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연기 밖으로 튀어나가는 강냉이를 주워 먹겠다고 다투던 모습이 생생하다. 거무튀튀한 아저씨의 작업복에서 느껴지던 삶의 고단함 속에 정겹고 따스하게 느껴지던 그 정경은 오래도록 어린 가슴에 각인되었다. 이것도 바로 삶의 진실이리라.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누구나 이 장면을 기억할 것이며 추억할 것이다. 이제 희미하게 잊혀지는 따스했던 그 순간을 소환해서 남겨 보고 싶었고 이 작품을 목우회에 출품해 입선했다. 미대를 나오고 빽이나 줄이 있는 사람들만 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들었지만 맨땅에 그야말로 오롯이 내 실력으로 입선되었을 때, 내 진실을 인정받았다는 기쁨으로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인의 소개로 교외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어떤 분이 인테리어에 쓰겠다며 이 작품을 고가에 구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내왔다. 그러나 거절했다. 그 액수가 아무리 커도 내 진실을 팔수가 없었다. 하지만 방송대에 선물하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나의 소중한 무언가를 기꺼이 줄 수 있다는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이승숙 동문·국문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