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물은 바다를 지향합니다. 바다는 썩지 않는 존재이며, 모든 걸 받아들여 섞으면서 생명을 길러내고, 배를 띄우는 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이면서 생명의 완성입니다. ‘강과 바다는 개울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河海不擇細流(하해불택세류)는 원래 인재 발굴의 중요성과 그 방법을 이야기한 말입니다. 그러려면 왕이든 대통령이든 도량이 커서 사람을 잘 용납해야겠지요.
이 말은 공부나 학문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학문의 자세를 비유한 말에 百川學海(백천학해), “모든 내는 바다를 배운다”는 게 있습니다. 바다나 강은 같은 물이지만 강은 바다를 배우며 흘러 마침내 바다로 들어갑니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않을 새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가나니”라는 용비어천가의 가사가 바로 이 말입니다.
학문의 자세, 강물을 거슬러 오르듯
바다에 이르려면 당연히 샘이 깊어야 합니다. 샘은 공부와 학문을 하려는 의지, 향학열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주자학의 시조 주희(朱熹)는 공부하면서 느낀 감회를 읊은 시 「觀書有感(관서유감)」 두 수를 남겼습니다. 두 번째 시는 이렇습니다. “昨夜江邊春水生 蒙衝巨艦一毛輕 向來枉費推移力 今日中流自在行(작야강변춘수생 몽충거함일모경 향래왕비추이력 금일중류자재행), 지난밤 강가에 봄물이 불어나니/몽충 같은 큰 전함도 터럭 하나처럼 가볍네/지금까진 힘들여 옮기려고 애만 썼지만/오늘은 강 가운데로 저절로 흘러가누나.” 이 시는 “물이 차면 배는 떠오른다[水到船浮]”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깊이 궁리하고 공부하다 보니 의문이 절로 풀리고, 안 보이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관서유감의 첫 번째 시에는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문거나득청여허 위유원두활수래), 묻노니 그대(연못)는 어찌 이리도 맑은고?/근원에서 活水(활수)가 오기 때문이네.”라는 말이 나옵니다. 당연히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뜹니다. 그러려면 근원이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근원이 마르지 않더라도 한결같은 노력과 정진이 없으면 바다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장자』 秋水(추수) 편에는 끝없는 바다를 처음 보고 놀란 황하의 신 河伯(하백)이 북해의 신 海若(해약)에게 “이제 선생의 끝없음을 보게 되니 내가 선생의 문 앞에 오지 않았더라면 길이 대방가의 웃음거리가 될 뻔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大方家(대방가)란 문장이나 학술이 뛰어난 사람을 말하는데,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무슨 일이든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큰 성취를 이룩한 인물이 다 대방가입니다. 대방가에 이르는 길을 韓愈(한유, 한퇴지)의 시를 통해 알아봅니다. 그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書山有路勤爲徑 學海無涯苦作舟(서산유로근위경 학해무애고작주), 책이라는 산을 오르는 데는 부지런함이 지름길이요, 배움의 끝없는 바다에서는 고통을 배로 삼아야 한다.”
여기에도 學海가 나오지만, 학문의 길은 원래 고난과 고통의 길입니다. 신문을 돌리고 구두를 닦던 과거의 苦學(고학)만이 고학이 아닙니다. 실은 우리 모두가 고학생입니다. 공자는 학문을 따로 하지 않아도 태어나면서 아는 生而知之(생이지지)의 성인이지만, 우리는 고생을 하면서 배워야 아는 困而知之(곤이지지)의 보통사람들입니다.
왜 고생스러운가? 학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아가지 않으면 뒤로 밀려가게 됩니다, 學問如逆水行舟 不進則退(학문여역수행주 부진즉퇴),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 左宗棠(좌종당)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학문의 방법, 웅덩이 채우듯 단계적으로
이제,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맹자가 한 말입니다. “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원천혼혼 불사주야 영과이후진 방호사해), 샘이 깊은 물은 용솟음쳐 밤낮을 그치지 않고 흘러 (앞을 막는) 웅덩이를 채운 다음에야 나아가 대양에 도달한다.” 이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과이후진입니다. 물이 웅덩이를 채워야만 앞으로 나아가듯이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초등학생일 때 초등학생 공부를 하고, 대학생일 때는 대학생 공부를 합니다. 나아가 직장에 취직한 다음에는 차장일 때 부장이 되는 공부, 부사장일 때 사장이 되는 공부를 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배움의 길을 속성으로 마치려 하지 말고 차근차근 닦아 나가야 합니다. 인생에는 추월도 없고 월반도 없습니다.
卒業(졸업)은 학업을 끝마친다는 말이고, 정해진 과정을 이수했다는 증명입니다. 졸업과 비슷한 말에 畢業(필업)이 있는데, 필업은 과업을 모두 마쳤다는 뜻이니 과업을 끝내버렸다는 졸업보다는 지속성의 의미가 좀 더 큰 것 같습니다. 우리 선인들의 글을 살펴보면 요절한 사람에 대해 “공부에 졸업을 하지 못하고 갔다”고 안타까워하거나 스승의 서거에 부쳐 “이제 누구에게서 배워 졸업을 해야 하느냐”고 슬퍼하는 제문이 쉽게 눈에 띕니다. 공부의 완성을 삶의 완성으로 보는 시문들입니다.
작은 성취에 섣불리 들뜨지 말아야
그렇습니다. 졸업은 삶의 고비마다 이루어지는 각 단계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졸업은 다음 단계로의 출발점이 됩니다. 졸업을 뜻하는 영어 graduation은 단계, 등급이라는 grade와 어원이 같습니다. 등급이나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을 뜻하지요. 어원인 라틴어 gradus는 단계(step)을 뜻합니다. 독일어로 졸업은 Abgang인데, 이 단어는 퇴거 별세 졸업과 함께 출발 출항, (총의) 발사라는 상반된 의미를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어디에선가 떠나면 어디론가 가게 되지 않습니까?제자리에 머무는 것에 대해 옛 선비들은 斷港(단항), 즉 끊어진 항구라는 말을 쓰며 경계했습니다. 맹자의 말에 웅덩이가 나왔지만, 단항은 배를 띄워 바다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저 고여만 있는 커다란 물웅덩이입니다. 목은 이색의 「途中獨詠 三首(도중독영 삼수)」 중 두 번째 시를 봅니다. “君子當立志 立志學始通 君看斷港水 何由朝海東 盈科必不止 道明如日中 奈何自畵者 揚揚誇寸功(군자는 의당 뜻을 세워야 하니/뜻이 서야 학문을 통할 수 있네/그대는 끊어진 항구의 물을 보았나/어떻게 동쪽 바다로 들어가리오/구덩이가 차면 결코 멎지 않나니/도는 한낮의 해처럼 밝은데/어찌하여 스스로 자랑하는 자들은/의기양양 작은 공을 과시하는가?)”
작은 성취에 들뜨거나 만족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방송대는 스스로 택한 공부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학업이니 졸업의 의미가 더욱 각별합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더욱 정진하기 바랍니다. 졸업을 축하하며 연암 박지원의 「祭榮木堂李公文(제영목당이공문)」의 마지막 네 행을 인용합니다. “어찌 물에서 보지 않느냐/웅덩이를 채우고야 나아가니/뜻 이루는 것도 이 같은 법/흘러가는 냇물처럼 바빠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