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나물 리뷰] 영나물은 ‘영화가 나에게 물었다’의 줄임말로 최근 개봉한 영화에 대한 리뷰로 꾸민다. 한 편의 영화에는 하나의 세상이 담겨있다. 그리고 감독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영나물 리뷰’는 영화가 던지는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정답은 없다. 백 명의 관객에게서 백 개의 영화평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영화의 매력이기에. 세상 어딘가에서 영화를 보면서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쓰는 씨네마 레터!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일본을 넘어 전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46세)이 도발적인 제목의 영화「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돌아왔다. 국내에서는 3월 27일 개봉 후 예술 영화로는 드물게 개봉 한 달 만에 4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4월 25일 기준). 그런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이번 신작은 전작들과 많이 달라졌다. 그 변화를 해석하기에 앞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누구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사의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도쿄예술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다.「큐어」(2022)를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그의 스승이다. 기요시 감독과「스파이의 아내」(2021) 각본을 공동집필하면서 이미 타고난 이야기꾼의 면모를 선보였다. 그가 국제적 명성을 얻은 건 제68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해피 아워」(2015) 주인공 4명 모두에게 공동 여우주연상을 수여하면서다(국내 개봉은 2021년).

 

러닝타임은 무려 5시간 28분. 4개의 챕터로 구성된「해피 아워」는 연극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4편을 이어 모은 TV 시리즈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척이나 긴 러닝타임 내내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대사들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은데, 각 챕터들은 다른 듯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촘촘히 연결돼 있다. 종국에는 이 모든 대사들을 지나온 관객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가슴 벅찬 희망을 선사한다. 그것이 바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장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마구치 류스케라는 이름을 국내에 처음 알렸던 영화이자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공식 초청됐던「아사코」(2019)에서도 변주됐다(봉준호 감독 역시 이 영화를 보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 ‘입덕’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거장 반열에 오른 때는 의심의 여지 없이 2021년이다. 이 해에 그는 두 편의 영화,「드라이브 마이 카」로 제74회 칸영화제 각본상을, 「우연과 상상」으로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드라이브 마이 카」는 제94회 아카데미영화상에서 4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고,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일본 영화 중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처음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역시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그야말로 대사의 향연이 펼쳐지는 그의 영화를 몇 줄 시놉시스로 설명하기는 늘 어렵지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연출가 겸 배우인 남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작가 오토(키리시마 레이카)는 겉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 부부다. 남편은 우연히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지만, 그 이유를 채 묻기도 전에 아내는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여기까지가 40분 분량의 오프닝 시퀀스다!). 2년이 지났지만, 가후쿠는 여전히 아내가 녹음한 대사 테이프를 차 안에서 들으며 연습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히로시마연극제에 연출로 초청받으면서 그의 완벽했던 루틴에 균열이 생긴다. 규정상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토코)가 자신의 차를 운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사키에게도 아픔이 있다.

 

말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슬픔이 그의 전작들처럼 끊임없는 대사에서 표출되고 펼쳐지면서 영화는 치유와 화해의 장으로 달려간다. 이 과정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장기인 ‘연극 차용’이 십분 활용된다. 그는 안톤 체홉의 연극 「바냐 아저씨」를 영화 속으로 가져왔는데, 배우들의 나이 설정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요,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 등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을 기용해 언어의 장벽마저 초월하는 파격적 시도를 한다.

 

개인적으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최고작으로 꼽는「우연과 상상」역시 여러 이야기가 따로인 듯 하나인 듯 이어진다.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안에서 압박감마저 들만한 대사들로 가득 채워진 이야기들은 분절됐으면서도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된 것처럼 느껴진다. 종반부에 이르러서야 그 우연히 이어진 장면들은 관객을 인생의 순간, 깨달음의 순간, 소통과 성장의 순간으로 데려간다.

 

영화적 순간을 선사하던 감독의 달라진 질문
그렇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전작들에서 끊이지 않는 대사를 통해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때론 마법처럼 때론 기적처럼 넘어서면서 아름다운 영화적 순간을 선사해 왔다.

 

이제「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들여다보자. 도쿄 인근의 한 시골 마을에 한 회사가 글램핑장 건설을 추진한다. 회사는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연다. 프레젠테이션 주체는 자금난에 시달리는 연예기획사다. 화려한 언변에 PPT 몇 장으로 장밋빛 청사진을 보여주고 보수만 챙기면 되는 쉬운 일이라 생각했는데, 주민들 반응이 냉랭하다. ‘글램핑장이 들어서면 야생 사슴은 어디로 갈까?’, ‘산 상류에서 발생한 오수는 하류에 사는 주민의 삶에 피해를 끼친다’,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진다’라면서.

연예기획사 직원 둘은 주민들 사이에서 ‘심부름꾼’으로 불리는, 그러니까 마을 주민을 설득할 키를 쥐고 있는 타쿠미(오미카 히토시)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타쿠미가 산을 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연의 숭고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는 자신들의 인생과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으로 이어진다. 화해의 장이 열릴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타쿠미의 딸 하나(니시카와 료)가 실종되면서 영화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렇다면 신작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뭐가 달라진 걸까? 우선 러닝타임이 확 줄어들었다. 짧게는 3시간, 길게는 5시간짜리 영화를 찍었는데,「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러닝타임은 106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메시지 전달이 약하다거나 몰입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둘째로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전작에서는 카메라를 픽스(fix, 고정된 상태로 촬영하는 기법)한 상태로 대부분을 촬영했다. 카메라가 고정된 상황에서 배우들이 움직이고, 컷이 전환됐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4~5분간 카메라가 움직인다. 영화 곳곳에서 패닝(panning, 카메라를 고정한 채 좌우로 돌리는 기법), 트래킹(레일을 깔고 카메라를 이동하는 기법)을 사용하며 적극적으로 영화에 개입하는 카메라가 눈에 띈다.

 

마지막으로 달라진 부분은 ‘영나물 리뷰’에 걸맞게 던진 거대한 질문이다. 그는 전작들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사회 구조와 정교하게 직조했다. 복잡하게 얽힌 개인과 사회를 특유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종국에는 기적적인 화해의 순간을 선사했다. 그랬던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악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큰 질문을 던진다. 실제 글램핑장을 개발하려는 회사의 사장은 개발을 통해 지역 경제에 이바지하려는 인물로 그려진다. 연예기획사 직원 역시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주민들은 환경 오염이 우려될 뿐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악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가장 일본적이라는 정토진종을 창시한 13세기 승려 신란의 ‘악인정기설’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은 원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취약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과연 악인은 없는 것일까? 악인이 되게 만드는 상황만 있을 뿐일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렇게 답한다. “자연에는 선과 악, 그리고 정의가 없다. 악은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이런 통념에 카운터 펀치를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충격적인 영화의 결말 부분에 다다르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총에 맞은 새끼 사슴과 그 곁을 지키는 어미 사슴. 둘을 바라보는 하나. 그런 하나를 바라보는 타쿠미와 직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에서 스크린을 뚫고 고막에 꽂히는 총소리. 마치 자연의 등가교환 법칙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 관객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서일까. 미국 영화 매체 <데드라인(Deadline)>은 “답을 내리는 데 평생이 걸릴 수도 있는 질문을 던진다”라고 평했다. 결말부의 질문으로 그의 영화 세계는 한 차원 확장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관객 각자가 답을 찾아가도록, 그럼으로써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을 움직이길 원하는가?

 

칸·베니스·베를린·아카데미 석권한 젊은 거장
한 예술가가 평생 창조해 낼 수 있는 작품 수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걸작을 연이어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을 수상하면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칸, 베니스, 베를린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모두 수상한, 이른바 ‘그랜드 슬램’ 감독에 등극했다. 일본의 전설적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에 이어 두 번째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그랜드 슬램 달성이 여든을 넘어서였으니, 올해 46세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 시간은 충분하다. 다음 작품들을 기다릴 수 있는 동시대에 사는 우리는 축복받은 것임에 틀림없다.